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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정말 국가와 민족을 사랑했는가?

  • 입력 2015.08.13 11:47
  • 수정 2015.08.13 13:31
  • 기자명 김순종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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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을 맞아, <한국갤럽>은 전국 성인남녀 2003명을 대상으로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이 누구인지 조사했다. 그 결과 응답자의 44%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끌었다고 답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4%, 김대중 전 대통령이 14%로 그 뒤를 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이 더 많다고 응답한 사람은 67%, 과가 더 많다고 답한 사람은 16%였다. 또 박 전 대통령이 가장 잘못한 일로는 독재·유신·민주화 후퇴(72%)가 꼽혔고, 잘 한 일로는 경제발전(52%)이라는 답이 많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후 이 땅에는 서슬 퍼런 독재 시대가 열렸다. 그는 집권기 내내 민주화를 후퇴시켰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아는 그의 가장 큰 잘못이고, 위의 설문 결과는 그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이에 못지 않은 큰 잘못을 저질러왔다. 그럼에도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의 과오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견인하고, 국가와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한 지도자라는 신화적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그의 경제 성장 정책과 성과에 관해서도 상반된 주장이 있지만, 우선 이 글에서는 국가를 사랑한 대통령으로 추앙받고 있는 박정희의 실제 삶에 관해서만 짚어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17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5남 2녀 중 막내로, 그의 아버지는 빈농이었다. 어린시절의 박정희는 들판에 나가 전쟁놀이 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그는 10세가 되던 해에 구미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성적은 매우 우수한 편이었고, 이후 당시 명문이던 대구 사범학교에 진학해 1937년 졸업했다. 사범학교 내에서의 성적은 다소 저조한 편이었지만 당시의 수재들이 모인 학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상당한 엘리트에 속했다.

졸업 후 박 전 대통령은 3년간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교사 생활이 적성에 맞지는 않았는지,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에 의해 세워진 괴뢰국가였다. 만주 군관 학교에 입학한 박 전 대통령은 사범학교 시절과 달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더 큰 꿈을 꾸며 일본 사관학교로 편입했다. 여기서도 그는 눈에 띄는 생도가 되었다.


졸업 후 그는 만주군 예하 보병 8단에 소위로 임관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위해 만주와 연해주, 상해와 충칭 등지를 오가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던 그 시절, 박 전 대통령은 조국을 침탈한 일본에 충성을 맹세했던 셈이다. 이 시기 이미 '다카기 마사오'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던 그는 자신의 이름에 아직 조선인의 흔적이 남았다며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명을 하기도 했다. 이 때 만주군에 근무하며 그가 어떠한 일을 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각에선 그가 독립군을 진압하는 간도특설대 임무를 맡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던 중 1945년 갑작스럽게 광복이 찾아왔다. 당시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는 급히 일본 군복을 벗고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세를 불리고 있던 광복군에 가담하기 위해서다. 광복군에 가담한 것은 확실한 신분 세탁을 가능하게 했다.

이후 국내로 돌아온 그는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했다. 그가 입교한지 열흘도 지나지 않아 대구에서 10월 인민항쟁이 발생했다. 이 때 사회주의자였던 그의 형 박상희가 죽임을 당했고, 형의 죽음은 박정희를 남로당으로 이끌었다. 당시에도 우파와 좌파가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었지만, 그 때는 좌파가 집권하게 될 것이란 예측이 더 많았다.
남로당 입당후 박 전 대통령은 남로당이 군부에 심어놓은 프락치(간첩)으로 활동했고,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토벌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차출되었다. 그러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반공을 내세우며 군내 남로당원을 색출 중이었는데, 박정희가 남로당원이라는 사실이 탄로난 것이다.


그는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지만, 군부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전부 자백하며 살아남았다. 자기 조직의 명단을 다 공개한 사람은 다시 조직원이 될 수가 없다. 이 때문인지 그에 대한 처벌은 미약했다. 그는 처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것이 이후 징역 10년으로 줄었고, 결국은 형 집행 면제를 받았다. 이후
그는 좌익혐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재가 부족했던 상황과 확실한 전향 의사를 밝힌 덕분에 육군본부 정보국에 비공식 문관으로 복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한국전쟁이 터지자 현역으로 복귀했다. 이처럼 그는 늘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해가며 역동의 시기를 견뎌냈다.
한국전쟁 후 박정희는 장성이 되었다. 그리고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장갑차를 이끌고 한강을 건넜다. 이것이 그 유명한 5.16 군사정변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그는 얼마 후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 후 1979년 10월 26일까지의 행적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삶 전체를 돌아보면, 민족과 나라를 사랑해왔다는 흔적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늘 권력을 향해 달려온 기회주의자라는 평가가 더 합당하다. 일제 치하에서는 황국 신민을 길러내는 교사에서 황국군의 장교가 되어 살다가 해방 이후에는 광복군이 되고, 국내에 들어온 뒤 공산당 당원으로 변신했다가 분단 후에는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는 극우 독재 정치가가 된 그의 삶의 궤적은 마치 카멜레온과 같다.
광복 70주년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금도 우리 국민은 이러한 사람을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꼽고 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친일행적자를 처단하지는 못 할 망정 존경하고 있는 나라라니. 광복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날, 적어도 친일 민족 배반자들에 대한 찬양의 목소리보다 비판의 목소리가 더 높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과도한 기대일까? 광복절은 지금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다카기 마사오,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두 개의 일본식 이름을 가진 일본군 장교 출신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는 우리 국민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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