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광주 대단지 사람들이 식칼과 몽둥이를 들고 뛰쳐나왔다

  • 입력 2015.08.11 16:02
  • 기자명 김형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여기서 광주는 빛고을의 광주가 아니다. 넓을 광(), 경기도 광주를 의미한다. 1971 8 10일 경기도 광주 땅에서 그 서슬 푸르렀던 박정희 정권도 일단은 두 손을 든 심각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친숙한 용어로는 "광주 대단지 사건"이라 한다.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 광주의 상황은 참혹했다.
살기등등한 몽둥이와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참외를 실은 삼륜차 하나가 뒤집어지고 참외가 길거리에 나뒹굴었다. 그러자 군중들은 일제히 흙탕 범벅이 된 참외에 달려들었다. 참외 한 차 분이 금새 동이 났다. 우걱 우걱 어적 어적.... 어떤 소녀는 "배고파요 배고파요"를 울부짖으며 몽둥이를 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고 참외로도 성이 안찰만큼 몇 끼를 굶은 사람들이었다. 이 장면은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에서 실감나게 재현된다.

왜 그들은 그렇게 배가 고팠을까? 왜 소녀가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상황에 내몰려야 했을까? 그들은 대부분 용두동 마장동 이하 청계천변에 판잣집 짓고 살던 철거민들이었다. 서울시는 청계천 일대의 판잣집 23만 가구 약 127만 명을 강제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은 그 계획 때문에 쫓겨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군용트럭에 실려간 그곳은 전기, 전화, 통신 시설이 전혀 없었다. 서울에 가려면 버스로 2시간이 걸리는데 그 버스도 두 시간에 한 번씩 있었다.

ⓒ영화 <강남 1970>
강남 1970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은 광주로 쫓겨간 철거민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딱지'만 있으면 무허가 건물도 지을 수 있고 20평 정도의 땅을 얻을 수 있다. 1971년 건설 경기가 최고조일 무렵, 광주 대단지의 유보지 입찰 가격은 평당 20 9천원, 당시 도심이었던 종로구의 땅값 수준이었다. 얻은 땅을 되팔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우리도 한 번 잘살아 보자는 희망 하나만으로 가난을 버텼다. 하지만 이 나라는 그들이 이익을 얻게 그냥 둘 리 없었다. 총선이 끝나자마자 관청은 연달아 '딱지 전매금지 처분'을 내렸다.
희망은 사라졌다. 삶의 터전을 잃고 옮겨 와서 일자리 잡기도 어려운데 그나마 실낱 같던 미래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배고픈 임산부가 자기 애를 삶아먹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 정도로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서울 시장이라도 불러와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수 없는 진정이 이뤄졌고 서울 시장과의 면담도 약속됐다. 하지만 서울 시장은 약속을 어기고 나타나지 않았고 분노는 폭발한다. 광주 대단지 사건의 시작이었다.


남녀노소 모두 식칼을 들고 몽둥이를 들고 나선 이 광주 대단지 봉기는 박정희 정권을 일단 굴복시킨다
. 주민들의 요구를 서울시가 일단 수용하고 나선 것이다. 서울 시장은 최소한의 구호 양곡 확보, 생활보호 자금, 도로 포장, 공장 건설 시 세금 면제 등 모든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 이상은 나아갈 수도 없는 자연발생적인 봉기였지만 그 위력은 박정희 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물론 앞서 말한 대로 주동자는 "공산당의 지시를 받아서 그 짓을 했다,"는 자백을 토해내고 고문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지만 멀쩡히 터전 잡고 살던 사람들을 내몰고 그들 위에 새집을 짓고 빌딩을 세워 이익을 취하려는 방식은 변함이 적다. 권리금 같은 건 당연히 보장되지 않고, 인테리어 비용 같은 것도 너 좋자고 한 것이니 보상할 필요 없다. 국가는 그저 최소한의 보상금만 내어주고 먹고 떨어지라는 식의 배짱이다. "10만 명 풀어놓으면 알아서 먹고 산다."고 말 했던 서울시의 입장은 40년이 넘게 지나서도 바뀌지 않는다.

도쿄의 도시계획 120년의 역사에는 항상 상식이 통하고 있었다. 권력의 나무도 없었고 정치 자금의 창출도 없었으며 이권의 개입도 없었다. 개인의 재산권이 무참히 짓밟히거나 탈취되는 사건도 없었다. 하물며 도시계획을 통해서 재벌이 탄생되고 육성된 과정도 없었다. 그 쪽의 도시계획을 '바람기가 전혀 없는 날의 남해 바다'로 비유한다면 이쪽의 도시계획은 '태풍을 맞은 목포 앞바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울도시계획의 이야기> 한울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