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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동포와 이방인의 경계에서

  • 입력 2015.08.03 15:05
  • 수정 2015.08.03 15:38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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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원적(아버지의 고향)은 서류상 함경북도로 되어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중국 길림성이다. 할아버지는 일제 시대 두만강을 건너간 수많은 조선인 중 하나였고, 아버지는 만주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살다가 해방 이후에 다시 고국에 돌아왔다. 할아버지의 형제들 가운데 남쪽으로 돌아온 건 오직 할아버지네 가족 뿐이었다. 다른 형제들은 북한이나 만주로 흩어졌고, 이후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았다.
내가 고2 정도 되었을 무렵 집으로 편지 한 통이 배달됐다. 편지 겉봉에는 “조선남반부(朝鮮南半部) 부산시(釜山市) 양정동(陽亭洞)..”으로 시작하는 발신인 주소가 적혀 있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중국에 살던 나의 작은 할아버지, 즉 할아버지의 동생이었다. 중국과는 수교도 되어 있지 않은 시절이었다. 몇 번의 편지가 오간 끝에 아버지는 홍콩을 통해 중국에 들어가 연길까지 가는 장거리 여행을 불사하며 작은 할아버지네 가족을 만나고 오셨다. 그들을 만나고 오신 아버지의 감격은 각별했다.

사람들도 얼마나 순수하고 정겨운지 몰라. 남조선에서 손님 왔다고 얼마나 반갑게 맞아 주는지..... 옛날 우리 모습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아. 학교에서도 우리 말 가르치고 우리 글 배워. 중국은 중국인데 중국이 아니야. 완전히 우리 땅이야. 조선족 땅이야.

나는 조선족이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들었다. 이후, 중국과 우리 관계가 개선되면서 그 단어는 국민 모두에게 가까워진다. 86년 아시안게임 때 이미 ‘중공’ 선수단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호를 획득했고, '중국'이란 말은 자유중국(대만)보다 중국 본토를 일컫는 말로 변해갔다. 당시의 분위기는 1988년 6월 26일자 한겨레신문의 한 기사에서 잘 드러난다.

6.25를 통해 총칼로 맞섰던 한중국 관계가 학문 교류의 새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한국을 알고 배우려는 중국의 젊은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는 가운데 이미 학위를 받고 본국으로 돌아간 중국 국적의 유학생도 있다. 국내의 유학생은 대부분 중국 국적의 한국인 3세로 친척 방문을 목적으로 입국해 체류기간을 연장, 실질적인 유학의 형식을 밟고 있다.

이 기사에 따르면 ‘현재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유학생’은 3~4명이었다. 물론 현재의 중국 유학생 수에 비하면 빈약한 수치다. 그러나 '중국인 유학생'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했던 시절인 것을 감안하고 당시의 유학생들이 대개 조선족었다는 사실을 보면, 초기의 한-중 교류에서 조선족이 큰 영역을 담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도 조선족은 대단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10억 인구의 중국 속에서 자치구를 꾸리고 살아가며 우리 언어와 문화를 지켜낸 ‘중국 속의 한민족(韓民族)’ 이라는 이미지에는 호기심 뿐 아니라 과잉된 민족 의식, 분단 이전에 대한 향수와 ‘옛 고구려의 후예’ 같은 신비감까지 범벅이 되어 있었다.
방송사들 역시 다투어 연변을 찾았다. 그 가운데 KBS에서 방송했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한국 취재진이 촬영을 마치고 떠날 때,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 조선족 여성 몇이 기차를 따라오며 작별 인사를 하는 장면이다. "또 만납시다." 하는 눈시울들이 붉어져 있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고, 그들의 손짓에서는 깊은 정이 묻어났다. 당시 방송을 함께 보시던 아버지도 감회에 서려 한 말씀 하셨다. “저게 우리 모습이지. 조선족들은 정말 대우를 해 줘야 된다. 독립운동가들 후손 아니냐.” 그러나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이 변모하는 데에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결한 한민족'에서 잔인한 이방인으로1990년에 이르렀을 때 연변은 한국 유행가가 꽝꽝 울리는 가운데 백두산을 찾는 한국인으로 북적이는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이 모이게 된 연변은 곧 돈에 얽힌 추태로 얼룩졌다. 이때 일부 조선족들은 반대로 한국에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초기 고국 방문자들이 ‘중국 본산’ 한약재를 약간 들여왔는데, 이것이 쏠쏠한 장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 수많은 조선족들이 한약재를 싸들고 한국으로 달려왔다. 그래서 1990년대 초 덕수궁 돌담길과 시청역 지하 상가, 파고다 인근 공원에는 연변 사투리를 쓰는 조선족들의 노점이 즐비했다. 그들 대부분은 ‘가족 방문’을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바로 그 즈음 내 작은 할아버지도 한국 땅을 밟으셨다. 하지만 그 분은 팔 것을 들고오시기는커녕 우리가 무엇 하나 해 드리려고 해도 “일 없다!”고 손을 내저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서울 이곳저곳을 모시고 다니며 구경을 시켜 드렸다. 돌아가는 길, 작은 할아버지는 공항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손을 흔드셨지만, 아버지가 쥐어주시는 얼마간의 돈까지 끝내 사양하실 만큼 꼿꼿하셨다.
그러나 얼마 뒤, 조선족의 유입이 더욱 늘어나면서 우리에게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작은 할아버지의 아들과 며느리가 방문했던 것이다. 내게는 오촌 당숙모 뻘인 부인의 배는 남산만했다. 그들의 보따리에는 고슴도치 쓸개니 뭐니 하는 물건들이 수백만원어치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난감함을 숨기고 그 중 일부를 어찌 소화했지만 대부분은 처치곤란이었다.
결국 아버지는 여비는 보태주겠으나 한약을 더 이상 팔아 줄 수는 없다고 말했고, 그들은 실망한 얼굴로 집을 나섰다. 연락은 그 때를 기점으로 끊겼다. 이미 국내 한약재 시장은 조선족에 의해 포화된 상태였으니, 아마도 그분들은 가져 온 약재를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분들이 우리 집을 떠나면서 흘깃 돌아보던 눈초리에는 원망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시선도 묘했다. 처음 만난 사촌동생을 향한 반가움이나 연민과 별개로, 멸시의 색깔도 진하게 섞이고 있었던 것이다. 오촌 당숙이 우리 집을 떠났던 1992년의 설 즈음, 신문기사는 벌써 이전과 논조가 달라져 있었다.

설연휴가 계속된 5일 오전 9시께 서울역 앞 지하도에는 특이한 말씨의 중국 동포 50여명이 여느 때처럼 삼삼오오 떼를 지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한국에 온 지 한달쯤 됐다고 조심스레 말하는 김씨는 경기도 안산시의 한 염색 공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의 이야기판에 불쑥 끼어든 서울의 동포를 달가와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끼어든 서울 동포는 그들의 한국행을 못마땅해하고 감시해하는 방해꾼으로 비쳐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족은 서서히 한국 자본주의 피라미드의 맨 아래를 구성하는 집단이 되어 갔다. 식당 종업원부터 3D 업종의 노동자까지, 조선족들은 다른 외국인들과 함께 사회의 아랫부분을 메웠다. 어쩌면 조선족은 우리가 가장 늦게 발견한 ‘동족’이면서 가장 먼저 발견한 ‘외국인 노동자’였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상황이 나빠져도, ‘코리안 드림’의 홍수에 휩쓸린 조선족은 여전히 김포공항과 인천 부두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이들을 노리는 범죄도 기승을 부렸다. 1996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본부’가 짧은 기간을 조사한 통계만 봐도 사기 피해를 입은 조선족은 1만 8천명, 피해총액은 300억을 넘었다.


바로 그 1996년 8월 2일, 남태평양에서 페스카마 호의 비극이 일어났다. 조선족 선원들이 주도한, 한국 해운 사상 최악의 선상 반란 사건이었다. 한국인 7명, 인도네시아인 3명, 그리고 조선족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한 명의 한국인 선원과 인도네시아 선원들의 기지로 배 안에 갇힌 채 체포된 조선족들은 항해 내내 선장과 갑판장의 비인간적인 폭행과 욕설에 시달렸다고 입을 모았다.
그때 즈음 이미 험한 뱃일을 감당하겠다는 한국인들은 적었고, 그 빈 곳을 조선족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채우고 있었다. 당시 규정으로는 외국인 선원은 전체의 50%를 초과할 수 없었지만 한국인 선원 월급의 2-30%만 주면 고용할 수 있는 외국인 선원의 수는 그 기준을 우습게 초과했다. 페스카마 호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비명에 간 페스카마 호의 선장은 선장으로서 처음 항해를 나선 터라 의욕에 차 있었다. 처음 배를 타 멀미나 해 대고 일손은 서툰 조선족이 답답했을 것이고 그 호령은 부드럽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족들은 난생 처음 당해 보는 푸대접과 욕설에 분노를 키웠고 그 대립이 심각해지면서 비극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한국과 조선족 사회 양쪽에 심대한 충격을 던진다.
그들의 범죄 행각은 돌아볼수록 잔인했다. 특히 그 배의 선원도 아니었으며, 병이 나서 사모아 항으로 돌아가는 페스카마 호에 옮겨 탔을 뿐인 젊은이를 의자에 묶어 바다에 던져 버린 대목은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일부 한국인들은 조선족들이 보여 준 잔인함에 치를 떨면서 이들에 대한 편견의 벽을 높였고, 조선족 사회는 한국 사회의 차별이 이 참극을 빚어냈다며 어금니를 물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들은 6년 전만 해도 온 방송사 다큐멘터리가 “순박하고 소탈한 우리 민족의 원형질이 남아 있다”고 감격스레 읊던 조선족들의 전형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바뀌었을까. 주범으로 지목된 전재천은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는 고향에 있을 때 인자하기로 이름났던 음악 교사였다. 그의 5형제 모두 모범적인 군 생활을 거쳐 중국 정부로부터 ‘광영지가(光榮之家)’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기도 했었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던 특수한 존재, 완전히 다른 체제에서 자라난 외국인이면서 동시에 우리 동포였던 조선족들의 부침은 이처럼 매우 짧고도 파괴적이었다. 조선족 사회는 붕괴라는 표현이 모자라지 않을 만큼 격변을 겪었고 우리 사회는 우리 안에 내재된 배타성과 잔인함을 증명했다. 그런 의미에서 페스카마 호 사건은 일어나서는 안될 사건이지만,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한국 사회는 또 다른 페스카마 호가 나타날 가능성을 품고 있다. 몇몇 살인 사건과 함께 조선족을 향한 시선은 더욱 냉담해졌고 서로를 향한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1990년대보다 국내 조선족의 수는 훨씬 늘어난 상황에서, 이들은 더 뚜렷한 이방인이 되었다.
이처럼 조선족과의 간극도 좁히지 못하는 상황에서, “통일은 대박”이라던 대통령의 말에 새삼 의문이 생긴다. 90년대 우리 곁에 다가왔던 조선족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볼 때 과연 우리에게 통일은 대박일 수 있을까. 통일에 대한 고민과 준비가 미진할 때 갑작스레 통일이 들이닥치고 북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대거 유입된다면, 우리는 그 시절의 아픔과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까. 북한의 인구는 2천 2백만, 조선족의 열 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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