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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로빈슨 크루소의 귀환

  • 입력 2015.07.07 15:26
  • 수정 2015.07.07 15:45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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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끝났다

1955년 7월 5일 오후 4시 20분. 말쑥한 양복에 파나마 모자를 쓰고 짐보따리를 두 손에 바리바리 든 여행객 하나가 부산항에 도착했다. 기자가 지금 누가 가장 보고 싶으냐고 묻자 그는 더듬더듬 일본어로 대답했다. “아내와 아들 보형이가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이 아니었다.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에서 나고 자란 토종 한국인 조병기였다. 그는 1942년 징용에 끌려갔다가 엄청나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남양군도에 파견되는 노동자로 지원했다. 그것이 1944년의 일이었는데 그는 지독하게 운이 없는 편이었다. 그가 도착한 펠레류 섬은 몇 달 뒤 미군의 총공격이 예정돼 있는 곳이었다.
미군이 상륙하자 태평양 전쟁에서 늘상 벌어졌던 풍경이 펼쳐졌다. 일본군의 발악적인 저항과 미군의 소탕전,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자살하는 일본군 장교들 등등의 모습이 그것인데 이곳에서도 일본군의 저항은 치열했다.
전열이 무너지고 패잔병들은 숲속에 숨었지만 그들은 좀체 투항하지 않았다. 펠레류 섬에서는 전쟁이 끝난 지 2년씩이나 지나고서야 일본군 최후의 수비대가 “전쟁은 끝났다.”는 설득에 응해 무기를 버리고 숲에서 나왔을 정도였다.




한국판 로빈슨 크루소, 귀환하다

그런데 펠레류 섬의 숲 속에는 사람들이 더 숨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군인도 아니었다. 조병기를 비롯한 한국인 노동자들 3명이었다. 그들은 “미군들은 코와 귀를 자르고 혓바닥을 빼낸다.”는 일본군의 악선전을 그대로 믿었던 그들은 숲속에 들어가 이제나저제나 일본군이 상륙해서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기를 기다리게 되는데 단양, 영월, 제천 등 엇비슷한 고장 출신들이었던 그들의 운명은 엇갈린다. 영월 출신이었던 다께노(창씨개명한 이름)는 미군에 의해 사살됐고, 제천 출신의 한 사람은 사로잡혔던 것이다. 남은 것은 조병기 하나였다.



조병기 씨가 숨어 지냈던 펠레류 섬


그는 그야말로 로빈슨 크루소의 삶을 살게 된다. 미군들의 모래자루를 훔쳐 옷을 만들고 침구도 만들었다. 또 원주민들이 재배하는 다베오깡이라는 작물을 훔쳐 먹었고 만만한 달팽이를 잡아 구워 먹으며 아사를 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밭작물을 훔쳐먹는 사람인지 짐승인지 모를 존재에 대해서 주민들도 눈치를 채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숨어산 지 11년 만에 주민들에게 체포된다.
다행인 것은 그 섬이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일본어가 꽤 통했다는 것이다. 조병기는 자신이 한국인이며 11년 동안이나 숨어 살았으니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간절하게 반복했고, 한때 그림자조차 근접하기 싫어하던 미국의 도움으로 그는 고국행 배를 탈 수 있었다. 한국판 로빈슨 크루소의 귀환이었다.
그런데 그가 남양의 섬에서 곡식 서리를 하고 불씨를 지키며 세월을 보내고 있을 즈음, 고국에 남아 있던 그의 가족에게도 많은 일이 있었다. 그 발단은 해방되던 해 고향에 전해진 전사통보서와 유골(?)이었다. 대체 누구의 것인지 모를 유골이지만 가족들은 하늘이 무너졌다. 글 모르는 남편이 남의 손을 빌어 “난 잘 있다. 돈 많이 벌어 돌아갈게.”라며 전하는 편지를 읽으며 소작조차 떨어진 살림살이를 날품을 팔며 버텨온 아내는 살아갈 힘을 잃었고 결국 두 딸 거느린 홀아비에게 재가했다. 하나 있던 외아들은 큰아버지 집에서 살며 아버지의 ‘묘’를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귀신이 된 지 오래로 알았던 아버지이자 남편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찾아간 기자 앞에서 재가한 아내는 눈물만 흘렸다. “죽었다고 장사 지낸 사람이 오다니요...” 하지만 아내는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얼른 오기만 하면… 조 씨가 나를 다시 오라고 하면 (새남편 사이에서 낳은) 젖먹이는 뗄 수 없으니 하나만이라도 언제든 데리고 돌아가겠어요.” 열다섯살 난 아들 보형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엄마랑 셋이 살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산 좋고 물 좋은 고장 충북 단양의 이를 데 없이 평범하기만 했던 농민 가족은 기가 막히는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다.




일본도와 조병기의 불씨

정글에서 혼자만의 전쟁을 치렀던 일본군 이야기는 심심찮게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오노다 히로 소위는 29년 동안 필리핀인 30명을 죽였고 1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원주민 가옥 전체를 불지르는가 하면 사람을 토막내 죽이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던 그는 99식 소총과 탄환을 29년 동안이나 보관하면서 상시 사용 가능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필리핀의 마르코스 대통령에게 반들반들하게 닦아 놓은 일본도를 전하며 항복 의식을 치른 뒤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영웅이 됐다.


영화 <7인의 사무라이> 중


반면 일본인들에게 끌려갔던, 또는 더 많은 돈을 벌게 해 준다는 핑계로 일선의 섬에 처박혔던 노동자들, 일본인들에게는 사람 취급 받지 못하고 미군들에게는 일본군으로 취급되어 전쟁 포로, 심하면 전범으로 다뤄졌던 이들 중의 하나인 조병기가 10년이 넘도록 목숨을 걸고 간직했던 것은 작은 불씨였다. 처음에는 벌레와 야생 과일이나 작은 동물들을 날로 잡아먹던 그였지만 그로 인해 배탈이 나자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는 미군 주둔 지역에서 불씨를 훔쳐 온다. 그리고 은신처에 불씨를 마련한 이래 그는 11년 동안 불씨를 단 한 번도 꺼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도와 소총에 기름칠하며 사람을 죽이고 약탈을 서슴지 않아 가며 살아온 이와 극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싸우면서 자신에게 소중한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켜냈던 이 가운데 누구의 의지가 더 돋보일까. 어렸을 적 선생님들이 오노다 히로를 얘기하며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면서 마르코스에게 전한 일본도가 녹 하나 없이 날카로왔다는 둥, ‘상관의 명령이 있고서야 투항한’ 군인정신의 화신이라는 둥 했던 얘기를 즐겨 해 줬던 기억이 난다.
그 선생님들은 조병기를 알았을까. 그가 왜 로빈슨 크루소 노릇을 해야 했으며, 어떤 절박함으로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는지, 달팽이를 구워먹으며 벌레를 집어삼키며 그의 삶을 지탱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을까. 혹시 ‘수십 년 동안 무기를 손질한 사무라이 정신’에 비해 찌질하게 벌레나 파먹고 곡식이나 훔쳐먹다가 걸린 비루함을 통탄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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