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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후 세력은 없다

  • 입력 2015.06.25 16:18
  • 수정 2015.06.25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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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건호 씨의 ‘배후세력’을 주장하는 보도 장면 ⓒTV조선




배후 세력이 있습니다
지난 5월 23일,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6주기 추도식에서 노건호 씨는 자리에 참석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를 지목하며 날선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그날 저녁, TV조선은 <황금펀치> 프로를 통해 그에게 분명히 ‘배후세력’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TV조선이 내세운 근거는 이렇다.


발언내용에는 ‘오해하지 마십시오’나 ‘사과도 반성도 필요 없습니다’와 같이 ‘친노’들이 자주 쓰는 용어들이 들어있다. 즉 노건호 씨의 ‘의지와 관계 없이 친노에서 대독’시켰을 가능성이 크다.

허성우 국가디자인연구소 이사장


원고를 미리 써왔다는 것 역시 배후세력이 있다는 증표다.

고영신 전 경향신문 논설고문


노건호 씨가 아직 어리고 현실 정치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민영삼 앵커


쉽게 정리하자. 그가 ‘어려서’ 이런 논설문을 쓸 수 없었을 것이고, 결국 ‘친노’라는 배후 세력이 노건호 씨를 통해 원고를 ‘대독’시켰을 것이라는 얘기다. 더 언급할 가치가 없는 말이다.
다만, ‘아직 어려서’라는 말은 참 낯설지가 않다.




니들이 어려서 뭘 알겠니? 누가 시켰어?
지난 해 5월 3일, 정미홍 전 KBS 앵커는 세월호 희생자 추모집회에 참석한 청소년들이 ‘일당을 받고 동원됐다’는 요지의 글을 SNS에 게시했다. 이어 올린 다른 글에서는 “판단력 없는 청소년들을 이용하여 반정부, 반대한민국적 사고부터 먼저 가르치는 세력도 나타났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 나온 발언의 완벽한 재탕이다. 당시 공정택 교육감은 청소년들의 집회 참가를 두고 배후세력으로 전교조를 지목해 물의를 빚은 바 있다.


문제가 된 정미홍씨의 SNS


이런 무례함이 비단 한 진영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신은미, 황선의 통일콘서트’에서 사제폭탄을 투척했던 청소년 오 씨 역시 배후세력이 누구냐는 추궁을 받아야 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지난 2011년 11월 발표한 성명 또한 마찬가지이다. 전교조는 보수 청소년 단체의 활동을 비난하며, ‘청소년들을 누군가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쯤 되면 정말로 배후가 누군지 내가 더 궁금하다 ⓒ조이라이드


이쯤 되면 나이가 어리다는 것은 곧 ‘주체성 없음’과 동의어일지 모르겠다. 실제로 집회에 나서면 ‘어른’들은 묻는다. “누구 따라 왔니?” 이 말의 속 뜻은 나이가 어린 청년들은 항상 무언가에 선동 당해 휩쓸리는 존재이고, 정치적 판단을 스스로 하지 못할 것이라는 오만함이 섞여 있다.
이런 맥락에서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의 발언은 눈여겨볼 만하다. 아수나로는 2011년 발표한 논평을 통해 “청소년 단체가 무슨 활동만 하면 배후에 뭐가 있다거나 청소년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는 건 거의 공식이 된 것 같다.”며 “꼰대질에는 좌우가 없고 상하만 있다.”고 이들을 비판했다.




왜 배후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이는 비단 청년들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순수해야 할 이들’, ‘정치적이지 말아야 할 이들’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순간, 인터넷에서는 선동됐다느니, 배후에 누가 있을 거라는 댓글이 달린다.
최근 서울여대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서울여대 청소노동자들이 부당한 임금삭감에 항의해 투쟁을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러자 서울여대의 한 커뮤니티에서는 투쟁하는 청소노동자들의 배후에 민조노총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민주노총이 그들을 조종하고 선동해 파업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순수해야 할 어머니’인 청소노동자들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사태 앞에서 두고 두고 쓰일 명언을 남기신 분 ⓒMnet 언프리티랩스타


세월호 유가족들 또한 마찬가지다. 딸을 떠나 보낸 유민 아빠 김영오 씨는 딸이 죽은 이유를 밝히기 위해 단식 농성을 이어갔다. 얼마 후, 그가 금속노조 조합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배후설이 다시 제기됐다. 그 말에 이어 인터넷 댓글에서는 그가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시위꾼이라는 유언비어가 떠돌기 시작했다. ‘순수해야’ 하는 유가족들이 정치적 요구를 시작하자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배후를 갖게 되었다.
사실 몇십 년 전부터 지겹게 반복되는 이야기다. 광주 민주화 항쟁의 배후에는 북한이 있었다 거나 유신을 반대하는 학생들의 배후에는 인혁당이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오늘날에도 지겨움은 반복된다. 왜 투쟁의 배후에 누군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의 투쟁에 나서는 이유는 그들 나름의 판단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배후가 있다’ ⓒ KBS


이제 반대세력의 목소리를 ‘거짓’ 혹은 ‘비이성적인 것’으로 묘사하기 위해 배후론을 끌어오는 낡음을 끝낼 때가 왔다. 누군가의 정당한 주장에 대해 정당하게 반박하기보다 뒤에 뭐가 있다느니, 선동되었다느니 하는 낡은 말은 상대의 이성적 판단능력에 대한 거대한 모욕일 뿐이다.
배후세력은 없다. 누구든 마찬가지다. 용산의 망루에 올라선 철거민들도, 밀양의 송전탑 공사를 반대하는 어르신들도,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막아선 주민들도, 그리고 집회에 나선 청년들도, 모두 저마다의 판단과 의지에 의해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할 말은 단순하다.


나의 배후에는 오직 ‘내 선택’만이 존재할 뿐이다.



역사적으로 변화는 ‘배후세력’이 아닌, 각자의 ‘선택’이 모여 진행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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