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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엄마가 세월호의 엄마에게

  • 입력 2015.06.23 17:15
  • 기자명 20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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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지났으면 잊어야지



경찰들이 세월호 유가족을 경복궁 앞에 가두고, 시민들은 유가족과 만나기 위해 물대포를 맞으며 경찰과 싸우던 밤. 유가족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스런 맘에 종각부터 광화문을 지나, 무리 지은 경찰들 사이를 걸어 경복궁 앞까지 향했다. 유가족과 세상을 차단한 이 차벽이 어디서 끝날지, 그 끝까지 가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걷고 있을 때 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어서 집에 들어가. 그러다 다친다

괜찮다고 몇 번을 말했지만 계속되는 할아버지의 만류에 걸음을 돌렸다.

이게 다 무슨 고생이여. 유가족도 이제 1년이 지났으면 잊어야지.

이건 아닌데. 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내가 겪지 못한 일에 대해 누구를 설득시킬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광화문 광장을 천천히 걸어 ‘세월호 분향소’ 앞에 도착했다. 분향소의 사진 앞에 멈춰 서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기 시작했다. 너무 많았다. 304라는 숫자는 그런 숫자, 아니. 사람이었다. 한 눈에 담기 어려울 만큼 많은 수의 사람이, 한 순간 너무나 쉽게 사라졌다.


한 번에 눈에 담기에는 많았다. 너무나도. ⓒ연합뉴스

겨우 몇 개월 사랑한 사람을 나는 1년 동안 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세상은 18년을, 또는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의 죽음을 단 1년 만에 잊으라고 했다. 잊지 못하겠다고, 진실을 밝혀달라는 유족들에게 ‘돈 때문에 저러는 거’라고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당신이라면 잊을 수 있냐고 물어보면, ‘산 사람은 살아야지, 당신들 때문에 우리까지 못산다’며 슬퍼할 거면 세상에 나오지 말고 집에서 조용히 슬퍼하라고 했다.
‘경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내게, ‘이성적’이지 못한 내게, 누군가는 세월호 유족들은 ‘정치적 선동’을 당하는 거라고 말했지만, 그보단 유가족의 억울함이 더 와 닿는 어리석은 내 마음으로는, 아무리 해도 ‘잊으라’는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는 걸까. 왜 304명의 사람이 한 순간에 죽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혼자 슬픔을 삭이고 또 삭이면 잊을 수 있는 걸까.
당당히 ‘잊어야 한다’고 말하던 당신께, 나는 ‘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었다. 그런데 난 아직 스물다섯이고, 직접 가족을 잃은 사람도 아니었다. 내 나이를 두 번은 더 산 것 같은 당신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기력해서 슬픈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 무력함으로 4월을 보내고 5월을 맞았다. 세상은 변함없이 ‘세월호를 잊으라’했다. 아니, 더 이상은 잊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말없이 조용히 잊어갔다. ‘잊어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났지만, 그들에게 할 말을 난 아직 찾지 못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흐른 5월 18일, 한 기사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는 세월호 엄마와 광주 엄마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세월호 어머니와 만난 광주의 어머니 ⓒ오마이뉴스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그 잘못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 싸워야 했던 분들. 1980년 5월 18일 자식을 가슴에 품고 35년이라는 세월을 겪어내야 했던 어머님들이라면 ‘잊으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불가능한 말인지 그분들이 견뎌온 삶으로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4월의 광화문처럼, 5월에는 모든 시선이 광주에 몰려있었다. 나까지 5월에 찾아가 5월의 이야기를 묻는 건 어쩐지 형식적으로 느껴졌다.
결국 5.18 어머니집을 찾은 건 ‘ 그 날’로부터 보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당신 원통함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임금단 (84세) 1980년 5월 19일 첫 희생자 김경철 (당시 29세)씨 어머니

광주에 오기 전 무슨 말을 건네야 할 지 한참을 고민했다. 사실 안녕하시냐는 말도 함부로 건네기 어려웠다. 조심스럽게 건낸 “뭐 하고 지내시냐”는 한 마디에 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와 어머니는 천천히 1980년의 ‘그 날’로 흘러갔다.
세림
건강은 좀 어떠세요?
어머님
5월만 되면 엄마들이 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도 별 이상이 없다 그러는데, 온몸이 그렇게 한참을 아파. 6월이 돼서 이제 좀 나아졌어
세림
‘오월어머니집’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들었어요
어머님
우리한테는 그렇게 의지가 될 수 없어. 518 얘기는 무서워서 이웃 사람한테 제대로 말도 못해봤어. 518이라는 말만 들어가면 반 죽어서 나오니까. 얘기도 생각도 안 하고 싶은 게 돼서. 여기는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밥도 먹고 얘기도 나누고, 사람 대우해주고 챙겨주니까 살만하지.
세림
이전에는 마음이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어머님
그전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간 자식’을 생각하면 눈앞에 보이는 게 없어서, 따라 죽으면 죽었지 살아야겠다는 맘 정말로 없었어. 너무 맘이 아프고 힘들기 땜시. 우리 아들은 29살에, 결혼한 지 1년 6개월 만에, 딸이 100일 잔치한 지 열흘 만에 자기 아빠를 잃었거든. 그렇게 행복했던 가정이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이 사라져 분거여.
세림
전혀 예상하지 못하셨을 일이고
어머님

그럼. 우리 아들은 직장도 있고 결혼도 했으니까 생각조차 안 했거든. 그렇게 될 거라고는 요만치도 생각을 안 해봤는디 그런 사고를 당해분거야. 제일 먼저 곤봉으로 맞아가지고…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어. 처음에는 몰랐는데, 묻을 때 본께 금이 이렇게 가버렸더라고 머리에. 통합병원에서 기록을 보면 눈도 다 빠져불고, 턱도 다 나가불고, 곤봉 자국이 온몸에 그대로 나타나 있는 거야. 그런 걸 볼 때 눈으로는 볼 수가 없었어. 그놈을 보고 어떻게 기가 맥히던가. 악몽에 시달려가지고 내가 정신이상자가 됐었어.

마치 어제 겪은 일처럼 목소리를 떠는 어머니 앞에서 제대로 질문할 수가 없었다. 어머님께 필요한 건 ‘질문’이 아니라 ‘들어줄 사람’이었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진심을 다해 듣는 일’이었다. 잠시 생각을 멈췄다, 떨리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서 눈을 맞췄다.


어머님
날만 새면 그놈이 거기서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아. “엄마 왜 안 와. 엄마 보고 싶어, 엄마” 그냥 막 마음이 얼른 오라는 것만 같응께 날마다 거기를 갔지. 그러다가 유족들을 서로 만나갔고 ‘우리가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새끼들이 이렇게 억울하게 죽었는데, 부모들이 남은 진실을 밝혀야지. 우리가 이러고 있으면 쓰겄냐” 그런 말이 오고 가고 하다 본께 그렇게 몇몇이 모여서 데모를 하기 시작했지.
세림
절대 쉬운 일이 아니셨을 텐데…
어머님
우리 손녀 세 살 먹을 때였나, 엄마가 나가 불더라고. 간다고 하고는 두말도 안하고 새끼를 놔두고 그렇게 가 불더라고. 어찌나 기가 맥힌가. 데모를 갔다 오면 손녀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다, “엄마, 엄마, 어디 갔다 이제 와” 그래.
세림
할머니가 아니라, 엄마.
어머님
다 커서도 ‘할머니’라는 말이 안나온다고, 끝내 엄마라고 부르데. 그렇게 그놈을 키우면서 우리 아들한테도 원망을 많이 했다. 너무너무 힘들고, 슬프면 울어서 가슴 터지고, 웃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예쁜 짓을 하면 너가 보고 웃어야 되는데 내가 보고 있냐” 그런 생각이 들면 웃어도 또 눈물이 나고. 너무 힘들어서 “이 개새끼야, 이러려면 새끼나 낳지 말고 뒤지지. 이렇게 내 가슴에 피가 끓는 고통을 주냐” 생각해서.
세림
35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요.
어머님
내가 해보니까 알아. 세월호 유족도 마찬가지고. 아무리 ‘잊으라’고 말해도 지금은 눈에 절대 안 들어와. 지금 새끼 눈에 아른거리고, 보고 싶고, 가슴이 벌렁벌렁 거리고, 절대 옆에서 뭔 말해도 들리지도 않아. 그렇게 가슴 아프고. 겉으로는 말을 해도 내 맘 속으론 불이 벌떡벌떡 뛰고 그래. 지금도 마찬가지고.
세림
아…
어머님
지금 그 사람들한테 ‘잊으라’는 건 말이 안 돼.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지. 우리 아버지가 여섯을 나아서 다 죽고 나 혼자 살았어. 그런데 아버지가 밤에 이불을 다 펴시고도 갑자기기 담배를 피면서 한숨을 푹푹 쉬고 그러더라고. 그럼 나는 영문도 모르고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 잠자, 잠자.” 했거든? 그런데 내가 자식을 잃고 나니까 그때야 깨달은 거야. 우리 아버지가 이렇게 가슴이 아파서 잠을 못 이루고 창을 열고 먼 산을 보면서 담배를 피고 한숨을 쉬었던가 보다. 자식을 잃고 나니까 그게 깨달아지더라고.
세림
정말 당사자가 아니고서야 모를 마음 같아요
어머님
여기에 또 자식을 찾은 사람하고 못 찾은 사람하고 차이가 있다고. 못 찾은 사람은 새끼를 물속에 두고 얼마나 맘이 아프겠어. 안 겪어본 사람은 그렇게 마음 아픈지를 몰라. “그래도 이제는 잊고 살아.” 이렇게 말을 해도 그 사람들 귀에는 하나도 안 들려. 말로 못하지. 못 죽어서 사는 거야.
세림
그런데 사람들은 ‘지겹다, 이제 좀 그만하라’고 말해요.
어머님
내가 자식을 잃고 서울에 갔을 때, 누가 옆에서 “아니 광주 새끼들은 뭣 땀시 맨날 저래 데모를 하는가 모르겠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 속으로는 기가 막히더라고. 자식들 억울함 풀어주려고 그렇게 목숨을 걸고 데모를 하는데 저것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저렇게 욕을 해. 그런데 거기서는 말도 못하고 왔어. 지금도 똑같아. 세월호는 세월호대로 자기 일이 아니니까 듣기 싫은 거야. 세월호도 자기 해당 안 되는 사람은 “세월호도 그만 좀 하지. 밤낮으로 뭐시기 한다.”하기 마련이여. 자기 일 아니라고.
세림
자기 일이 아니니까.
어머님
모르지. 나만 해도 그래. 내가 전에 ‘여수,순천 사건’ 가족들을 만나서, 나도 모르게 ‘여수반란사건’이라고 이야기를 했어. 그런데 그 유족들이 “여수반란사건’이라고 하지 마쇼. 반란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벌떡거리니까.” 그래서 나도 “아이고 죄송하다고. 내가 나온다는 말이 그렇게 나왔다”고 그랬지.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고, 다 자기 일이 아니면 상처가 되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상처를 주는 거여. 그러니까 잊으라는 말도 함부로 할 수 있는거고.
세림
1980년 이후에 35년이 흘렀어요. 언젠가 ‘그 날’을 잊을 수 있을까요?
어머님
못 잊제. 지금도 35년이 지났어도 똑같이 보고 싶고, 그때 그 얼굴이 그대로 떠올라. 웃으면서 들어올 것 같고. 보고 싶으면 자다가도 기도를 해. “무심한 놈아, 나는 널 이렇게 보고 싶은데 꿈에라도 한 번 만나게 해주라.” 하고. 처음에 죽고 나서 4년인가 5년 지나서, 19일에 죽어서 18일이 제사거든? 밥이라도 한 그릇 해놓으려고 쌀을 담가놓고, 추모제에 나가면 잡혀가서 이틀을 경찰서에 잡혀있느라 제삿밥을 한 번도 못해봤어 몇 년을.
세림
경찰서에요?
어머님
응. 그런데 하루는 꿈에서 아들이 들어오더니 마루 위에 드러누워서 “엄마 배가 고파 죽겠어. 밥 좀 줘.” 그러면서 배가 등가죽에 붙어 있는 거야. 그래서 “워메워메 우리 새끼, 배고팠구나, 밥 차려줄게.” 벌떡 일어나니까 꿈인 거야. 그래서 내가 밥 한 끼 제대로 못 해줘서 이런 꿈을 꾸나 보다 하고 다음 날 시장에서 장을 봐서 밥을 해놨어.
세림
많이 그리우시겠어요. 정말로.
어머님
한번은 너무 생각이 나서 ‘꿈에나 한번 봤으면 좋겠다 경철아’ 그러다 잠이 들었던가 봐. 꿈에 카톨릭 센터에서 데모가 났는데, 사람들이 막 쫓겨가니까 신던 운동화도 벗어불고 가는겨. 그런데 머시매가 그 신을 가져다준다고 주워가지고 막 달리네. 꿈에 막 “경철아, 경철아” 불러도, 나는 안 돌아보고 신 갖고 그 사람들만 따라가는 거야. 그 사람들 신 찾아서 신겨야 한다고. 꿈 속에서 “경철아” 부르면서 땅을 막 치니까 딸네 사돈이 나를 흔들면서 “꿈꿨소?” 그래. 꿈이 너무나 허전해서 그러고 막 울었던가 봐. 경철아, 부르고, 땅을 치고 악을 쓰면서. 그 뒤로는 안 보이데. 보고 잡아서 ‘그 모습이라도 한 번만 보여주쇼’ 아무리 기도를 해도 안 보여. 이 세상에 못다 한 거 저 세상에 가서 맘껏 누리고 있는가 봐.

엄마의 ‘그 날’은 끝나지 않는다


서울에서 내려오기 전에는 몰랐다. 세상은 35년이라는 시간을 지나왔고, 518은 이미 역사 속에 묻혔지만 어머니에겐 아직도 매일이 ‘그 날’이라는 것을. 하루아침에 자식을 빼앗기고, 망가져 버린 삶이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이 상처는 언젠가 아무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상처를 안고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35년을 지나온 그녀를 만나기 전까진 진정으로 몰랐다.
광주의 어머니를 통해 사람들에게 ‘아직은’ 세월호를 잊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질문이 틀렸다. 이 상처는 ‘언젠가’ 잊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과거가 될 수 있는 상처가 아니다. 어머님에겐 매일이 다시 ‘그 날’이거나, 또는 ‘그 날’로부터 뻗어 나오는 상처들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광주에서의 인터뷰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기다린 듯 쏟아지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준비한 질문도 다 하지 못하고 그렇게 돌아왔다. 하지만 그 날 잡은 어머니 손에서, 어머니가 우는 걸 바라보다 영문도 모른 채 함께 흘러나오던 눈물을 통해, 나는 ‘왜 잊을 수 없는지’ 듣지 않아도 답을 알았다.
달력과 상관없이 내가 어머님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날은 여전히 아들을 잃은 1980년 5월 19일이었다. 마찬가지로, 광화문에 나가 세월호의 어머님을 만나는 그 날은 여전히, 2014년 4월 16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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