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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스 사태, 방역 실패는 예견됐던 일이다

  • 입력 2015.06.10 10:11
  • 수정 2015.06.10 10:14
  • 기자명 오주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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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한 마리라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자세로 철저하게 대응하겠다”며 자신감을 보이던 정부였다. 그런데 뚫렸다. 방역체계에 구멍 천지다. 감염자가 속출하고 발생지역도 전국으로 확대됐다.


정부의 첫 조치는 '유언비어 유포자 엄정 대응'
이번 사태와 관련해 박 대통령이 보인 첫 반응은 정부를 꾸짖는 것이었다. 첫 번째 사망자가 나온 지난 1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신종 전염병은 초기대응이 중요한데 미흡한 점이 있었다”며 정부를 나무랐다. 불리할 때마다 정부에서 자신을 이탈시키고 스스로 ‘심판자’가 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 절대군주처럼 행동한다.
국민 열 명 중 여덟 명 이상이 환자가 발생한 의료기관과 환자들의 동선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지만 청와대는 절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불안감과 혼란을 가중시킬 우려가 크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면서 유언비어와 괴담 유포자를 색출해 엄정 대응하겠다며 국민을 겁박했다. 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법무부와 검찰은 “관련법에 따라 엄히 처벌하겠다”고 목청을 높였다.
대통령이 주재한 첫 점검회의는 메르스가 확산된 지 14일이 지나서 열렸다. 2명의 사망자가 나오고 확진환자와 격리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뒤였다. 외신까지 “정부의 방역체계는 이미 뚫렸다”고 단언할 즈음 회의석상에 얼굴을 비친 박 대통령은 앞뒤 맞지 않는 특유의 모호한 어법으로 이렇게 지시사항을 하달했다.

...알아보고...파악하고...논의하고...분석하고...돌아보고...


정보 통제가 낳은 비극

긴박감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박 대통령의 이런 태도는 방역 현장에도 영향을 끼쳤다. 사망자와 환자 가족들이 고통을 호소하며 긴급 지원을 요구해도 “지침을 준수해야 한다”는 말로 묵살하기 일쑤였다.
정부의 대응은 웃음거리가 됐다. 복건복지부의 메르스 홍보 예방 포스터에는 “낙타와 접촉을 피하세요, 멸균되지 않은 낙타유와 익히지 않은 낙타고기 섭취하지 마세요”라는 국내 실정과 동떨어진 황당한 내용이 나온다. 해외에서도 정부의 ‘낙타 코미디’에 관심을 보였다.
모든 정보는 통제됐다. 의료진까지 환자 관련 정보를 몰라 진료를 한 뒤에야 감염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지자체들도 관내 어느 병원에 몇 명의 환자가 수용돼 있는지조차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답답한 시민들은 ‘유언비어 유포’로 처벌 당할 것을 각오한 채 SNS에 올린 일부 네티즌들의 감염 의료기관 정보를 들춰봐야 했다.
결국 서울시가 나섰다. 박원순 시장이 긴급 브리핑을 자청해 “감염된 의사가 행사에 참석했으며 1565명의 시민과 접촉했을 수도 있다”고 폭로하면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정부를 비판했다. “더 이상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시장으로서 모든 대책을 강구할 것이며 환자가 발생한 의료기관도 그 이름을 공개하겠다”고 선포했다.



지자체의 어쩔 수 없는 독자 행동
박 대통령은 이런 박 시장을 정면으로 비난했다. “지자체나 관련기관이 독자적으로 해결하려고 할 경우 혼란만 초래할 뿐”이라고 공격했지만 시민들은 박 시장 편이었다. 박 시장의 질타 때문일까? 박 대통령은 박 시장의 브리핑이 있던 다음 날 처음으로 메르스 대책본부를 찾았다.
국민여론은 박 시장을 지지했다. 그러자 정부는 마지못해 환자가 발생했거나 경유한 의료기관 리스트를 공개하기에 이른다. 이 자리에서 최경환 총리대행은 박 대통령을 두둔하기 위해 거짓말까지 했다. “대통령께서 지난 6월 3일(박 시장의 폭로 하루 전) ‘환자가 발생한 의료기관을 국민에게 알려주어야 한다’고 지시하셨다”고 주장했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뤄볼 때 사실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청와대와 정부는 4일과 5일에도 공개 불가 입장을 고수했으며, 메르스 대응과 관련된 대통령의 일정은 7일까지도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메르스가 확산된지 19일 만인 8일에야 박 대통령이 나서 “메르스 즉각 대응팀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사망자가 늘고 확진환자가 세 자리 수에 육박하는 등 4차 감염까지 우려되는 상태가 될 때까지 뒤로 빠져 있다가 이제서야 ‘대응팀’ 운운한다. 초기 대응 실패에 대한 사과나 해명은 아예 없다.



사태를 악화시킨 ‘독재의 향수’
실패의 원인은 비공개와 독단이다. 박근혜 정부의 ‘불통과 독선’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절대자 ‘빅 브라더’와 미셀 푸코가 주장한 ‘파놉티콘’을 연상시킨다.
‘1984’에서 ‘빅 브라더’는 모든 권력을 틀어쥔 숭배의 대상이며, 국민들은 무한한 애정과 존경심으로 그를 바라보도록 세뇌된 존재에 불과하다. ‘파놉티콘’은 ‘모두(pan)’와 ‘본다(optic)’가 결합된 용어다. 특정한 한 사람은 ‘모두’를 볼 수 있지만 ‘모두’는 그 한 사람을 볼 수 없도록 돼 있는 구조를 의미한다. 이 한 사람은 ‘모두’의 감시자이자 절대권력자다. 박정희는 ‘유신’이라는 파놉티콘을 만들어 만인을 감시하고 통제하려 했다. 박 대통령은 박정희식 ‘파놉티콘’을 두 눈으로 보고 체험하며 ‘파놉티콘의 마력’을 향수한 장본인이다.
그래서 이번 사태도 ‘파놉티콘’의 시각에서 해결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전체의 상황을 권력자만 볼 수 있도록 정보를 차단하고, 모든 권한을 한곳에 집중시켜 통제하려 했다. 이것이 실패의 원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파놉티콘’의 마력에 푹 빠진 ‘빅 브라더’처럼 행세한 최고권력자 때문에 국민 모두 전염병 공포에 떨고 있다. 대응 실패는 애당초 예견됐던 일이다.
권력자가 만인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파놉티콘’의 시대는 끝났다. 대중이 권력을 감시하는 상호감시의 시대가 도래한지 오래다. ‘시놉티콘(synopticon) 시대’가 이미 시작됐는데도 ‘1인 권력자’의 시각에 매몰됨으로써 화를 자초한 것이다. 세상과 대중이 진화하는 방향을 거스르는 대통령의 모습을 이번 사태를 통해 똑똑히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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