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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벗은 월남 소녀의 절규

  • 입력 2015.06.09 13:58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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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공포>, 닉 우트, 1972.


이 사진을 처음 보았던 것은 국민윤리 아니면 도덕 교과서에서였다
.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으나 총화단결이 이뤄지지 못해 망해 버린자유 베트남얘기가 나오는 단원에 실린 사진이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사진을 기억하게 된 계기는 좀 저열하다. 한창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왕성하던 청소년들끼리 저 소녀가 옷을 입고 있는 것인지홀딱벗고 있는지에 대해 내기가 붙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저 소녀가 왜 저렇게 발가벗은 채 처절하게 울면서 거리를 달리고 있는지의 이유를 알았더라면, 아무리 철없는 중고딩이라 하여도 그런 내기에 감히 이 사진을 들이대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의 전세가 점점 베트콩 쪽으로 기울어가던 1972 67. 심야에 베트콩은 사이공 인근의 트랑방 마을을 습격 점거한다. 날이 밝은 후 베트남 정부군은 탈환 작전을 펴지만 베트콩의 완강한 저항으로 작전이 여의치 않았다. 이에 남베트남 정부군 부대장은 늘 하던 대로 공습 지원을 요청했고 미 공군 폭격기는 득달같이 날아와 트랑방 마을에 맹폭을 퍼붓는다. 그들이 퍼부은 것은 네이팜탄이었다.
네이팜탄은 나프타와 팜유를 주원료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찐득찐득하게 몸에 달라붙고 물로도 꺼지지 않고 뒹굴어도 꺼지지 않는 지옥불 같은 화염을 내뿜었다. 한국전쟁 중에도 빨치산들에게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무기이거니와, 베트남의 밀림에서도 네이팜탄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 네이팜의 화염이 군인과 민간인, 어른과 아이, 베트콩과 양민을 절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네이팜탄에 화상을 입은 한국 군인


네이팜탄이 시커먼 연기를 토하며 터진 후 트랑방은 불바다가 됐다
. 순간적으로 타오르면서 주변의 산소를 확 빼앗아가 버리는 폭탄의 특성상 요행히 불구덩이를 면해도 일산화탄소 중독이나 산소 부족으로 픽픽 쓰러진 사람들도 많았다. 그 와중에도 요행히 살아난 사람들은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죽을 힘을 다해 뛰어 나왔다. 찐득찐득한 화염이 달라붙은 옷은 그들의 피부를 녹였고, 피해자들이 옷을 벗을 때 피부까지 함께 벗겨져 나갔다. 발가벗은 소녀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목욕을 하다가 도망나온 것이 아니었다. 저 발가벗은 목덜미와 등, 팔에는 3도 화상이 자리잡고 있었다. 섭씨 3천도의 네이팜의 혓바닥이 그녀를 희롱한 흔적이었다. 소녀의 이름은 킴푹. 사진 속에서 함께 울부짖는 소년은 그 오빠였지만 네이팜의 불길은 다른 형제 몇 명을 삼켜 버린 뒤였다.
이 사진을 찍은 이는 베트남 출신의 AP 기자 닉 우트였다. 사진을 찍은 뒤 우트는 급히 자신의 차에 킴푹을 싣고 병원으로 가지만 킴푹은 무려 17차례의 수술을 견뎌야 했다.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이었다. 닉 우트의 사진은 퓰리처 상에 빛나는 역사의 기록으로 남았지만 킴푹은 전쟁의 참혹함에 질려 버린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는다.
몇 년 후 베트남은 패망했다. (또는 해방됐다.) 새로운 베트남 정부에게도 킴푹은 특별한 존재였다. 제국주의가 부른 전쟁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울부짖는 소녀, 그로 인해 참혹한 상처를 입은 소녀의 이미지를 이용하고자 했고, 그녀가 보란 듯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약학을 전공한 소녀는 공산주의 형제국 쿠바로 유학까지 갈 수 있었다. 거기서 그녀는 베트남계 유학생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이 부부는 그렇게 견결한 사회주의자들이 되지 못했다. 부부는 모스크바에 신혼여행을 다녀오던 중 중간 기착지였던 캐나다에서 망명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킴푹은 기독교에 귀의하여 우리나라 말로 하면 간증자로 명성을 쌓는데 적어도 한 명의 영혼은 확실히 구한다. 킴푹의 구원을 받은 이는 그날 마을에 네이팜탄을 퍼부었던 폭격기 조종사 존 플러머였다. 그는 자신이 투하한 폭탄의 성과(?)를 똑똑히 보고 수십 미터 아래에서 사람들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냄새를 귀와 코에 담을 만큼 근접 폭격을 했었다.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킴푹의 사진이었다. 스틸 사진 속의 소녀가 울부짖는 소리가 그를 괴롭혔고 사진 속에서 뛰어나와 자신에게 달려드는 듯한 환영에 시달렸다. 24년 동안 그는 그런 괴로움 속에서 살았다. 두 번의 결혼도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술 없이는 못 사는 폐인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 1996년 재향군인의 날, 그는 동료들과 함께 워싱턴을 찾았는데 그날 워싱턴은 특별한 손님을 맞고 있었다. 바로 킴푹이었다. 그녀는 평화의 꽃다발을 전하며 자신의 전쟁 체험을 회고하고 그 비극의 재연을 막아야 함을 역설했다.


화상 때문에 아직도 고통스럽지만 이젠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저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을 겪으며 죽어갔다는 걸 말씀 드리고 싶어요. ... 그날의 사진 속, 내 뒤에선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육신을 잃은 사람들도 즐비하게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철저히 파괴되었지만 그들은... 사진에 찍히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듣던 존 플러머는 미친 듯이 사람들 사이를 뚫고 앞으로 달려나간다
.


나입니다. 내가 당신 마을을 폭격한 사람입니다.


필사적이었다
. 스물 네 해 자신을 뒤덮어 온 죄책감을 털어버리려는 듯 그는 계속 반복해서 외쳤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이제는 소녀적 모습이 거의 남지 않은 킴푹은 이렇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벌써 다 용서했어요.


야수와 같은 전쟁의 끄트머리에서 만났던
,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평생 볼 일이 없었을 베트남 여자와 미국인 남자는 서로에게 준 상처를 씻고 보듬으며 용서하고 화해한다. 플러머는 24년의 고통이 그 2분간의 대화로 사라졌다고 토로했다.
닉 우트 기자가 사진에 붙인 제목은 <전쟁의 공포>였다. 전쟁의 공포는 네이팜의 뜨거움과 포탄의 굉음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정작으로 무서운 부분, 그 진정한 공포의 원천은 너무나도 선량하고 죄 없는 사람들이 그 인간성을 접어 두고 살인에 몰두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른 것뿐이었지만 도무지 스스로를 납득시킬 수 없어 괴로워했던 선량한 사람이 수천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불덩어리들을 다발로 안겨야 했고, 태어나서 지은 죄가 하나 둘도 안 되었을 아이들이 속절없이 죽어가야 했다는 점일 것이다.
베트남보다 먼저 불을 뿜었던 한국 전쟁에서는 얼마나 많은 플러머들이 헤아릴 수 없는 킴푹을 죽여야 했을까. 그들은 용서를 빌 곳이 있었을까. 용서를 할 기회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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