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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기억의 투쟁

  • 입력 2015.06.09 10:16
  • 수정 2015.06.09 10:18
  • 기자명 영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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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세월호가 침몰한지 1년이 지났지만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아무도 이렇게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을 줄은 몰랐지만, 정말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2014년과 2015년의 모양을 습자지에 옮겨 그리고 겹쳐본다면 다른 점을 찾을 수 있을까. 여전히 바다 속에 잠겨있는 세월호, 여전히 광화문에서 노숙하는 유가족, 여전히 말을 잃은 대통령과 정치권, 여전히 왜 침몰했는지 밝혀지지 않은 진실, 여전히 안전하지 않은 사회, 여전한 절망, 불안과 탄식. 대통령은 세월호 이전과 다른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새끼손가락보다 더 쉽게 꺾였다.
사람들이 석연치 않은 마음을 안고 지난 4월 16일, 희생자들의 1주기에 시청 앞 광장에 모였다. 이들은 죽은 이의 영정 앞에 꽃을 놓겠다며 길을 걷다가 차벽에 막혔다. 경찰은 꽃을 들고 걷는 이들에게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를 쏟았다. 악몽 같은 밤이었다. 5월 1일까지 광화문 분향소를 향해 걷는 사람들은 수차례 경찰과 만났다. 경찰은 지난 10년 간 학습한 대로 이들을 강경하게 진압했다. 경찰은 이렇게 몇 번을 버티면 모든 게 잠잠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5월에 들어서 언론은 세월호를 언급하지 않는다. 각처에서 세월호 소식을 접하기란 쉽지 않다. 상황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이내 아무 말이 없다. 경찰이 바라는 대로 우리는 잠잠해졌다.


ⓒJoins.com


거리를 덮었던 노란 리본은 사라졌다. 아직까지 학생들 책가방에 작은 리본이 달려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숫자가 줄어들 것이다. 2014년에는 언론들이 앞 다투어 사회의 트라우마를 염려했는데, 지금 우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다. 어떤 이들은 공공연하게 지겹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왜 세월호를 기억해야 하냐고 묻는다. 잊지 않겠다는 말이 곳곳에 넘쳤던 2014년과 분명히 다른 풍경이다. 바뀌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사람들의 마음만은 기민하게 바뀌고 있다.


가장 우람한 맥락 의존적 기억, 세월호
사람들은 이제 왜 세월호만 기억해야 하냐고 질문한다. 세월호가 무엇이 그렇게 특별하냐고 묻는다. 참사가 많은 이곳에서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대구 지하철은 기억하지 않으면서 왜 세월호만 유난이냐고 말한다. 아픈 이가 많은 여기에서 노인과 빈민과 장애인은 왜 잊었느냐고 추궁한다.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당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세월호‘만’ 기억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이미 이 질문은 널리 퍼졌다. 세월호만은 잊지 말자고 외쳤는데, 사람들은 세월호만 기억하고 다른 것은 잊자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은 부당하다면서 세월호를 외면했다.


La Reproduction Interdit, Rene Magritte


생각해 보면, 우리는 경험하는 모든 사건을 기억하지 않는다. 경험하는 모든 것을 기억할 만큼 인간 뇌의 용량은 크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사시사철 낮밤의 무수한 경험 중에서 기억할 것을 선택한다. 의미 있는 순간만이 선별되어서 뇌 속에 남고, 선별된 각각의 순간들도 각기 다른 무게감으로 기억된다. 당장 찬밥과 남은 반찬으로 먹은 오늘 아침식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일주일 전 친구와 신촌에서 먹은 맛있는 파스타는 기억한다. 그리고 그 파스타 맛보다 십이 년 전 아버지와 노을이 지는 캠핑장에서 먹은 돼지고기 맛이, 더 오랜 과거임에도 더 선명하게 기억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우리의 기억은 종일 외운 영어단어는 잊지만, 앞서 돼지고기 맛과 같이 서사적 맥락 속에서 일어난 사건은 비록 그것이 찰나여도 오랫동안 잊지 못한다. 노을이 질 때 이따금씩 되짚어지는 돼지고기의 기억, 심리학에서는 이를 ‘맥락 의존적 기억(context-dependent memory)’이라고 한다.
사회의 기억도 개인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맥락 의존적이다. 3.1 운동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아우내 장터의 유관순을 떠올린다. 이날 가장 중요한 사건은 서울 인사동에서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인데, 오히려 지방 작은 장터의 여성이 우리 기억 속에 남았다. 18세 어린 나이, 모두 두려워 할 때 사람들 앞에 나선 용기, 작은 몸에 새겨진 모진 제국주의의 고문, 피기도 전에 일찍 진 들꽃 같은 서사적 맥락이 우리로 하여금 유관순을 기억하게 한다. 유신과 신군부를 지나는 동안 죽은 이들이 많지만, 우리는 두드러지게 박종철을 기억한다. 바라는 것이 많을 나이의 총명한 청년, 그를 찢은 물고문,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해명의 맹랑함, 1987년의 민주화는 이와 같은 서사적 맥락 속에 있는 박종철에게서 시작됐고, 그는 지금까지 열사로 기억된다.
작년 4월 16일 세월호를 결코 잊지 않겠다는 외침도 서사적 맥락 속에서 시작됐다. 아이들은 고등학교 내내 가장 고운 추억을 만드는 수학여행을, 배를 타고 떠났다. 설레는 마음으로 밤새 재잘거리고 잠에 들었을 것이고, 그렇게 맞은 아침에 배가 기울었다. 배가 시나브로 물에 빠지는 동안 언론은 전원 구조됐다는 오보를 냈고, 잠시 후 전 국민은 아이들이 수장되는 장면을 생방송으로 시청했다. 정부는 잘 구조하지 못 했고, 최선을 다해 구조하지 않았다. 대통령은 참사 7시간 후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방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여권은 비하와 멸시의 발언을 계속 뱉었다.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 국가의 총체적인 무능력, 그래서 국가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지 절규했던 순간, 이게 작년 4월 16일 이후의 풍경이고 침몰한 세월호를 둘러싼 맥락이었다. 세월호는 우리가 21세기에 마주한, 가장 우람한 맥락 의존적 기억이었다.


The Persistence of Memory, Salvador Dalí

비견할 만한 것을 찾자면 9.11 테러로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납치된 항공기가 세계무역센터에 돌진했고, 그 광경은 연속해서 매체에 노출됐다. 사람이 건물에서 추락하는 장면이 포착됐고, 거대한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이 생중계 됐다. 항공기 보안규정에 허점이, 국가 안보에 구멍이 드러났다. 미국은 2001년 9월 11일 이후 이전과 전혀 다른 나라가 되었다. 항공기 보안이 무례할 만큼 철저하게 강화됐고, 안보지상주의 국가가 됐다. 매년 9월 11일이 오면 미국의 모든 언론은 바로 그 9월 11일임을 보도하고, 많은 사람들은 꽃을 들고 세계무역센터가 있던 곳으로 모인다. 미국인들은 아직까지 9.11 테러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 미국 사회에서 9.11 테러는 잊지 않겠다는 의지와 상관없이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됐다. 세월호는 우리에게 미국의 9월 11일과 같거나 그보다 더 큰 무게감이 있다. 기실은 세월호 역시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이제, 세월호의 기억도 투쟁의 장에 들어섰다
그런데 누군가 잊을 수 없는 세월호를 잊었다고 선언한다. 잊지 못 하는 사람들에게는 잊으라고 강요한다. 기억을 상기하려는 시도들을 비난한다. 추잡함을 꾸며내 잊지 못할 기억을 잊을 만한 기억으로 바꾼다. 하지만 잊을 수 없는 것을 잊으려는 시도는 자연스럽지 않다. 누군가 왜 이 부자연스러운 것을 의도할까. 누가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의식적으로 편집하고 있을까. 조지 오웰은 1984년을 예언하면서 ‘현재를 통제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현재를 부당하게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자는 과거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조작하고자 한다.
2014년과 2015년, 세월호가 침몰한 수면 위로 부조리가 몸통을 드러냈다. 자본은 탐욕스럽게,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평형수를 빼고 화물을 실었다. 촌각을 다투는 구조과정 속에서도 국가와 기업이 유착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언론은 최악의 오보를 저질렀고, 참사 하루 만에 사망자 보험금을 계산했다. 위험천만한 세월호가 바다를 다니기까지 공무원은 아무 감시도 하지 않았다. 세월호 진상조사 위원회가 영장 한 장 얻을 수 없는 세월호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이 과정에서 항의하는 유가족에게 정치권은 ‘가만히 좀 계세요’라고 호통을 쳤다. 유가족이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 때문에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제, 사회, 정치, 언론, 모든 영역에서 부조리가 드러났다. 멀쩡한 곳이 없었다. 이 부조리한 구조 위에 정상적이지 않은 경제권력, 사회권력, 정치권력, 언론권력이 서 있는 모습도 밝혀졌다. 세월호의 순간, 국민들은 권력들이 왜곡된 사회구조 속에서 모든 것을 누리면서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권력의 모순된 행동이 사회를 더욱 구불거리게 만든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이들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칫 한 걸음만 잘못 옮겨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퍼졌다. 그 순간 모든 권력은 긴장했다. 추모의 행렬에 신속하게 동참했고, 나는 공범이 아니라고 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흐르고 이들의 표정이 편안해지면서 도리어 “뭘 잘못했느냐?”라며 따져 묻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권력의 표정이 편안해진 때는 ‘이제는 세월호를 잊자’는 이야기가 만연해진 때와 일치한다.


9인의 인양, 조용상


누군가는 이렇게 기이한 현실에서 애꿎은 죽음 하나를 기억하는 게 무슨 대수냐고 묻는다. 당당한 이 질문은 기억의 힘을 간과했다. 사소해보이지만, 기억은 변화를 추동하고 나아가 역사를 추동한다. 이 때 승리의 기억보다 패배나 죽음의 기억이 더욱 강한 추동의 힘을 지닌다. 패배나 죽음은 이를 초래한 부조리를 극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1980년의 광주는 승리의 기억이 아니라 학살의 기억이다. 어설프고 아둔한 독재자에게 사람들이 속수무책 죽었다. 독재자는 기억을 통제하고자 모든 신문을 검게 물들였다. 하지만 편린들이 남아서 기억을 회복시켰고, 시간이 지나고 1987년 민주화를 이뤄냈다. 학살의 끝자락에 새벽 도시를 울렸던 “우리를 잊지 마세요”라는 외침이, 그리고 그 외침을 기억하는 힘이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기억은 약자나 패배자에게 남은, 거의 유일한 저항의 수단이다. 원수를 잊지 않고 보복하는 서사적 클리셰는 기억의 힘이 역사 속에서 반복됐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기억은 저항의 시작이며 동시에 저항의 최종 목적이고, 기득의 권력에게 저항하는 동력의 대부분은 기억에서 비롯한다. 그 까닭에 권력은 계속해서 어떤 기억들을 훼손시키려고 한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기억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의 기억을 의도적으로 선별하고, 선별되지 않은 기억들은 왜곡하고 억압한다. 그렇게 저항의 동력이 될 만한 기억은 사회의 공식적 기억에서 적극적으로 배제된다. 제주의 4월 3일이 수십 년 간 무장공비의 공작으로 소개되면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것, 최근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둘러싼 보훈처의 태도도 이런 일환이다. 권력은 기억하려는 시도들을 탄압했고, 때로는 기억 자체를 몰가치한 것으로 날조했다.
이 작업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일제 하 반민족행위자들이 건국세력으로 둔갑했다. 정경유착을 통해 범죄를 저지른 경제사범들이 산업화의 공신이 되어 경제 성장의 공로패를 가져갔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민주적 질서의 기본요소를 모두 파괴한 독재자가 반공의 가면을 쓰고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변모했다. 반면에 각자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상대주의의 명제 아래 1980년의 광주는 폭동으로 정의됐고, 민주화는 비추천의 표시가 됐다. 기억은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투쟁의 장이 되었다. 김구를 기억하는 것, 전태일을 기억하는 것, 박종철을 기억하는 것은 이제 단순한 추모의 문제가 아니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투쟁의 방식이다.


ⓒdonga.com


이제 세월호의 기억도 투쟁의 장에 들어섰다. 설마 세월호까지 다툼의 여지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으나, 지배 권력은 세월호에 파상공세를 부었다. 세월호를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선언하면서 세월호를 둘러싼 자신들의 과오를 모두 제거했다. 보수 언론은 집권 정치세력의 실정보다 광화문 네거리의 세월호 유가족을 경제난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모 국회의원은 ‘천문학적’ 인양비용을 언급하면서 실종자들을 찬 바다 속에 버려둘 것을 종용했다. 이제 우리는 권력의 공세에 휩쓸려서 잊을 수 없는 세월호를 잊을 것인지 정해야 한다. 자신의 기억과 그것의 집합으로서 사회의 기억을 감히 편집 당할 것인지 기로에 서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저항하지 않으면 잊혀 진다는 사실이다.


트라우마의 망각, 또는 망각의 트라우마
서사적 맥락에서 생성된 기억은 새로운 서사적 맥락을 창조해내는 사건이 된다. 이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서사 속에서 사건의 기억, 기억의 사건을 삭제하려고 한다. 여기에 저항하기 위해 할 일은 잊을 수 없는 것을 잊지 않는 것, 그것뿐이다. 우리는 이제 망각 의식의 제물이 될지, 기억 의식의 제사장이 될지 결정해야 한다. “권력에 맞서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이다.” 밀란 쿤데라의 말이다.


© MPI of Psychiatry


개인의 경우 적절하게 처리되지 않고 망각된 기억은 정신적인 외상을 초래한다. 충격적인 기억을 해소하지 못한 채 의식에서 배제한 개인은 언젠가는 분명 정신적인 문제를 맞닥뜨린다. 완전한 망각이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기억을 무작정 배제할 때 상황은 더욱 절망적으로 변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정신과 상담치료는 발달 과정에서 해소되지 못하고 무의식에 파뭍힌 기억이 무엇인지 발견하면서 시작하고, 발견된 기억을 적절하게 해소하면서 끝을 맺는다. 삶에서 마주한 사건을 적절한 모습으로 의식에 담아내는 것, 이 당연한 일을 수행해내는 사람만이 건강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
사회의 경우도 개인과 유사하다. 중요한 사회적 사건은 기억의 유한성 속에 지워지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남아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지배 이데올로기가 의도한 망각이 관철되더라도 사건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꿈엔들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우격다짐으로 잊힐 수 없는 노릇이다. 기억하지도, 망각하지도 못 하는 병리적 상황을 트라우마의 망각, 또는 망각의 트라우마라고 표현한다. 사회의 부정적 기억을 직시하지 못하고 망각할 때 그 사회는 망각의 트라우마로 인한 문제를 겪는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가 독일과 일본을 비교할 때, 독일의 군대는 신병 교육 과정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홀로코스트 범죄를 교육 내용에 포함시켰다. 나치의 학살을 직시하면서 다시는 전쟁의 군대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반면 일본의 자위대는 식민지 침략을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침략의 시대를 영광의 시대로 기억하면서 군대로의 전환을 모색했다. 시간이 흐르고 어느 사회가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회인지 명확하게 구분됐다. 일본이 아직까지 망각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콤플렉스적인 행동을 계속 한다. 반면 독일은 기억을 직시하며 전범의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하지만 독일도 처음부터 자신의 과오를 기억한 것은 아니었다. 1960년대 서독 정치권은 ‘강력한 독일’을 주창하며 자신의 역사에서 전범의 기억을 삭제하고자 했다. 그 때 68혁명 발발하면서 사람들이 기억의 복구를 요구했다. 그 결과 독일은 과거보다 더 나은 사회로 발전했다.
한국은 이제까지 독일보다 일본의 길을 걸었다. 일본보다 망각의 강도가 높았고 망각의 빈도가 잦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기억은 친일파의 집권으로 해소되지 못 했고, 한국 전쟁의 기억은 이어진 독재 때문에, 독재의 기억은 그에 뿌리내려 성장한 권력들의 방해로 적절하게 처리되지 못 했다. 심지어 학살의 사건들조차도 공식적인 기억으로 남지 못 했다. 한국 사회는 망각의 트라우마에 빠졌다. 망각의 트라우마는, 작게는 일베의 풍경부터 크게는 세계 1위의 자살률까지 정신병적 상황을 낳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노근리부터 광주까지 망각된 기억의 상당수를 사회의 의식 속으로 복권시켰지만, 이마저도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이르러 다시 훼손당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많은 기억들이 사회적 무의식의 밖으로 나오지 못 하고 있다.
망각이 기억보다 보편적인 상황에서, 기억의 투쟁은 한편으로 치유의 과정이다. 망각의 트라우마의 치유는 망각된 부정적 기억을 발견하고 그를 직시하면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우주선 콜롬비아호가 폭발한 사고 이후 콜롬비아호 내부 모든 부품의 출처, 콜롬비아호가 있기까지 모든 명령의 체계를 기록했다. 9.11 테러 이후에는 수백만 장의 자료를 검토하여 최종 만 장의 보고서를 남겼다. 이 결벽증적 기록은 사건의 기억만이 치유를 위한 씻김굿이라는 마음가짐에서 비롯했다. 세월호 진상조사 위원회는 사고 1년이 지나는 동안 정권의 방해 아래 아무런 공식 기록을 남기지 못 했다. 기억의 치유는 시작되지 않은 채 다시 망각의 트라우마가 고개를 든다. 트라우마가 덧붙은 사회에서 세월호를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모든 말은 허무하다. 세월호를 잊고 돌아간 일상이 온전한 일상일 수 있을까? 그 일상이 예전보다 불행하리라는 예감은 과연 터무니없는 것일까?


희망은 오직 기억에 있다.
세월호는 우리가 맞은 맥락 의존적 기억이고, 우리의 기억은 저항의 한 방식이고, 나아가 트라우마의 치유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호를 기억하는 일은 존재인 동시에 당위가 된다. 다시 말해, 세월호의 기억은 누군가 부정하려고 해도 남을 것이며, 피하려고 해도 의무가 될 것이다. 우리가 사회로 엮여있는 한, 세월호의 기억과 상관없는 사람은 이곳에 없다. 사람마다 감수성과 관심의 정도가 다른 것을 고려해도 지금의 망각은 적절하지 않다. 더구나 공연한 비방이나 모욕은 이해할 수 없다.


ⓒkyeonggi.com


기억은 쉽지 않다. 진정한 기억은 단순히 어느 한 사건이 있었다고 되뇌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 그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현의 과정은 고통스럽다. 바다 속 찬물에 희생자들의 몸이 굳어가는 순간, 어둡고 닫힌 공간에서 물이 차오를 때 엄습하는 공포 같은 것을 상상할 때 태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권력의 망각 요구에 쉽게 반응한다. 똑바로 보는 것보다 고개를 돌리는 것이 간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소한 고통을 외면한 후에 찾아오는 고통은 더욱 감당하기가 어렵다. 아무도 안전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자칫 작은 실수만으로 나와 가족의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공포, 아무도 나를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수단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자도생의 부담감, 의미를 잃은 국가와 해체된 사회, 그것은 절망의 최후 모습이다.

세월호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주어진 기회다. 죽을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아이들의 목숨으로 값을 치룬 기회다. 세월호의 침몰 직후 사람들은 사회가 새롭게 바뀌기를 기대했다. 상식의 사회, 성찰의 사회, 무엇보다 안전한 사회, 이것이 모두가 바란 새로운 사회의 모습이다. 이를 위해 눈을 들고, 고개를 돌리지 말고, 끝까지 응시하고, 마침내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이 기회는 다음 참사로 유예되고, 다시 누군가 애꿎게 죽을 것이다. 다시 절망을 경험할 것이다. 세월호는 반드시 마지막 기회여야 한다. 이제 우리는 망각이란 어둠을 파고들어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들을 쟁취해야 한다. 희망은 오직 기억에 있다.

연세대학교 교지 <연세>지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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