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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해고 그거 불법입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뚫고 나온 <송곳> 같은 인간

  • 입력 2015.06.04 09:56
  • 수정 2015.06.04 09:57
  • 기자명 김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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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도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걸음 내딛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본문 1권 192~194쪽 중에서)


ⓒ 창비


만화가 최규석의 웹툰 <송곳>이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포털 사이트 웹툰면에 2013년 12월부터 연재된 것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현재까지 연재된 분량은 <송곳> 1·2·3권에 담겼다.
외국계 대형마트 '푸르미'에서 벌어지는 부당해고가 <송곳>의 핵심 줄거리다. 주인공 이수인은 매니저로서 매장의 직원들을 관리하는 인물이다. 정직원보다 파견 업체 직원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을까 주의를 기울이고, 업무와 관련된 갈등은 규정에 맞게 처리하는 사람이다.
그러던 어느날, 과장 직책의 이수인은 상부로부터 "직원들을 해고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전부 내보내라"는 것. 명백한 부당해고였다. "인격 모독이든 징계든 해서 제 발로 나가게 하라"는 상사의 지시에 이수인은 고개를 떨군다.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한 경험이 뇌리를 스쳐 가고, '지켜야 할 규율이 명확'하던 그 곳에서조차 부조리를 견디지 못했던 나날을 떠올린다. 붙임성 없는 성격 때문에 직원들과 친분도 없지만,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그를 괴롭힌다. 결국 이수인은 부장에게 "그거, 불법입니다. 전 못하겠습니다"라고 나직하게 대답한다.
그 순간부터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된다. '세상 어디에서나 걸림돌 같은 존재'로 살아온 이수인에게 더욱 험난한 나날이 다가온다. 뒤늦게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노동법을 공부하지만, 자본과 권력을 앞세운 사측의 횡포에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과연 이수인과 마트 푸르미 직원들은 부당해고의 횡포를 이겨낼 수 있을까?


'고장 난 신호등', 갑질에 휘둘리는 노동 현실


ⓒ 창비

이수인과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은 구고신이다. '떼인 임금 받아드림'이라고 적힌 명함을 나눠주는 구고신은 '부진 노동 상담소'를 운영하는 노동 운동가다. 원칙주의자에 내성적인 이수인과 달리 그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다가간다. "남의 일 해주고 돈 받으면 임금이고, 일하는 사람한테는 일하는 사람의 권리가 있는 겁니다"라고 의식을 일깨워주기도 한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가끔 고장 난 신호등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곳의 신호등은 모두 꺼져 있다. 대체 이 신호등들은 왜 존재하는 것인가."

(본문 2권 218~219쪽 중에서)


본문에서 묘사되는 대기업의 횡포는 부당해고, 노조 파괴, 불법 파견 등의 사례로 이어진다. 노동조합이 많은 유럽에서 왔지만 한국지부 마트에서 노동자를 핍박하는 프랑스 점장도 등장한다.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묻는 말에 프랑스인은 사측의 마음을 담아 대답한다.

여기선 그래도 되니까

관련법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한국의 노동 현실이 <송곳>에서는 '꺼진 신호등'으로 비유된다. 법과 공권력조차 갑질에 휘둘리는 노동자를 제대로 지켜주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등장 인물들은 두려움을 안고서 대항하기로 결심한다. 이유는 오직 하나, '사람답게 일하면서 살고 싶다'는 것이다.


인간 대접 받으려는 평범한 사람들


"인간의 선함과 약함에 기댄 관행들을 제거하면 조직은 멈춘다. 합리성을 강요하는 모든 조직은 비합리적 인간성에 기생한다."

(본문 3권 73쪽 중에서)

촌철살인과 같은 말들이 정곡을 찌른다. 스스로 '노골리스트'로 부르는 최규석 작가 특유의 문장들을 읽을 수 있다. "가장 혼자 벌어서 네 식구 그럭저럭 먹고 살고 애기들 키우고 하던 그런 시절은 다시 안 와요!"라는 외침은 오늘날 한국의 상황을 고스란히 표현한 것 같다. <습지생태보고서> 등 그의 예전 작품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날카로운 현실 인식이 담겼다.



ⓒ웹툰 <송곳>

2008년부터 장기간의 현장 취재와 인터뷰를 통해 작품 구상을 위한 자료를 준비한 노력도 엿보인다. <송곳>에 등장하는 상황이 무게감 있고 대사와 연출이 현실적인 것을 보면 말이다. 극 중 사례와 캐릭터는 실화와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주인공인 노동 운동가 구고신은 성공회대 노동대학 학장인 하종강 교수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깔끔한 그림과 함께 노동조합과 사측의 대응, 노동법 등 관련 지식까지 자세하게 나와있다. 노동삼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학교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용어들도 읽을 수 있다. 영화화 계획을 밝힌 <송곳>은 드라마까지 2차 판권 문의를 받는 중이라고 한다. 작품성과 함께 재미까지,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것이 인기의 이유로 보인다. 웹툰 작가 주호민씨는 <송곳>을 두고 "한마디로 심각하게 재밌다"고 표현했다.
무엇보다 끌리는 점은 <송곳>이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정의감 넘치는 영웅 캐릭터의 등장으로 악당을 무찌르는 권선징악의 줄거리가 아니다. 그보다 "너무 위대해지지 맙시다"라고 서로를 다독이고 끊임없이 갈등과 두려움을 겪는 개인들의 이야기에 가깝다. 직장과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인물들인 것이다.
<송곳>을 읽고 미처 받지 못했던 퇴직금을 받았다는 댓글 등 경험담이 이어지면서 '노동상담소'라는 웹툰에 별칭이 붙기도 했다. 무감각해진 현실의 부조리를 돌아보게 만든 만화라면, 이미 그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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