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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여성 그리고 인권'을 위한 박물관

  • 입력 2015.06.03 15:22
  • 기자명 고함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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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주택가 골목. 골목골목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해진 담벼락을 마주하게 된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앞, 담벼락에는 위안부 할머니와 소녀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 고함20


담벼락은 전통무늬를 그대로 옮겨놓은 색감으로, 꽃이 흐트러진 채로 그려져 있다. 꽃이 피어있는 담벼락을 따라 걷다 보면 다른 한쪽 담벼락에 흰 저고리에 까만 한복 치마를 입은 앳된 소녀의 초상화와 그 바로 앞에 할머니 한 분의 초상화가 눈에 띈다. 한적한 주택가의 골목, 이 담벼락에는 왜 소녀와 할머니가 그려져 있을까. 이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중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할머니의 눈동자에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만 같다. 유독 할머니의 눈에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이들의 왜 이곳에 덩그러니 그려져 있을까, 할머니의 눈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함께 외치는 평화’ 이 글귀 바로 아래, 담벼락에 그려진 소녀와 할머니가 하고 싶었던 말이 담겨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었을 아픔, 지금도 세계 곳곳 전쟁터에서 아이들이 겪어야만 하는 아픔이 중단되길 바라며 평화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우리의 마음을 나눠요.’ 평화를 바라는, 할머니를 기억하려는 마음을 담아 쓴 노란 나비 메모들이 데려다주는 그 끝.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이 있다.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을 방문한 이들이 적은 노란나비 메모으로 담벼락이 가득채워지고 있다. ⓒ 고함20





그날 밤, 소녀는 영문도 모른 채 강간당했다
박물관을 들어섰지만, 중간 통로를 연결하는 문이 막혀있었다. 작은 창문을 통해 관리인에게 박물관 요금(미취학 아동 1,000원, 중고등학생 2,000원, 성인 3,000원)을 냈더니 박물관으로 입장하는 문이 아닌 반대편 문을 대뜸 가리켰다. “저쪽 문을 통해 지하실부터 관람하면 됩니다.” 그리곤 기자의 손에 할머니 사진이 있는 노란 표 한 장을 건네줬다. “오늘은 정소운 할머니를 기억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은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침략전선을 확대했다. 정소운 할머니는 2년만 일본공장에서 일하면 일본군에 끌려간 아버지가 풀려날 거라는 마을 이장의 말에 속아, 배에 몸을 실었다. 정 할머니는 자카르타를 거쳐 스마랑에 도착했다. 13명의 소녀와 도착하여 임시 목제 건물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일본군은 방 하나당 한 명의 소녀가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낯선 작은 방은 문도 없었고 그저 천 조각이 안을 볼 수 없도록 가려주고 있었다. 그 안은 침대로 하나로 가득 찼다. 13명의 소녀 중에서 정 할머니가 가장 어렸다. 낯선 나라, 낯선 곳에서 정 할머니는 잔뜩 긴장한 채 있었다. 밤이 되니, 한 장교가 술에 취한 채 정 할머니가 있는 방으로 들어와선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그 밤, 정 할머니는 장교에 의해 강간을 당했다.


하루에 2-30명을 상대하기도 했다. 13명의 소녀를 관리했던 포주는 상대하는 사람들의 수마다 군표를 주며 ‘나중에 돈으로 바꿔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포주는 단 한 차례도 돈으로 바꿔 준 적이 없었다. 상대하는 군인의 수를 헤아릴 수도 없었고, 주말에는 건물 밖으로 줄이 끝없이 길었다. 한 사람당 ‘사용’ 시간이 있었지만, 위안소를 찾는 군인이 많아, 실제로는 2~3분 정도면 끝내고 다른 군인이 들어왔다.
상대하지 않겠다고 정 할머니가 버티자 군인들은 주사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아편이었다. 아편에 취해 쓰러져 있다가 간간이 정신이 들어 눈을 뜨면 군인들이 옷도 다 벗지 않은 채, 강간하고 있었다. 또 버티면 아편을 주사했다. 그 과정을 반복하는 사이에 아편에 중독되고 말았다. 일본은 전쟁 발발 시, 여자와 아동을 강간, 강제매춘 등 각종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국제조약에 비준한 상태였다. 일본은 식민지였던 조선에 대해서 이 조약을 적용하지 않았다.
소녀들의 몸은 군인들의 폭력에 멍이 들었다. 칼을 휘두르는 군인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다. 총과 칼을 든 군인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감시하는 탓에 자유롭게 이동할 수도 없거니와 탈출은 곧 죽음을 뜻했다. 소녀들은 지옥과 같은 성 노예 생활에 대부분 우울증에 걸렸고 자학하기도 했다. 이곳을 떠나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이었다. 그사이, 2명이 죽었다. 2명의 소녀는 마치 길가의 죽은 짐승처럼 버려졌다. 사람으로 태어나 어여쁜 딸, 언니, 누나였을 소녀들의 죽음을 일본군은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 장례식도 없었다. 그저 사용하곤 버리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일본이 패전했다. 일본군은 빠르게 그들의 만행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살아있던 10명의 소녀에게 방공호로 들어가라고 했다. ‘이제 죽는구나.’ 싶었다. 그때 연합군이 일본군 기지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소녀들을 폭격 가운데 두고 도망가기 급급했다. 폭격의 위험으로, 비로소 자유를 되찾은 정 할머니는 한국으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홀로 분투했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폐허가 된 집과 폭격 중에 챙겨온 아편이 전부였다.
“목숨만 부지하고 있으면 내 몸은 빼앗았어도 내 정신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정서운 할머니는 일본의 사과도 받지 못한 채 2004년, 삶을 마감했다.




죽음의 공포보다 두려웠던 그것
관리인이 가리킨 문을 따라가면 전쟁 도중 위안부로 끌려가며 걸었을 쇄석길, 위안부 생활을 했을 건물의 황량함, 개인적 경험을 재현해 놓은 지하 전시실이 있다. 이 전시를 통해 할머니들의 위안부 생활을 알 수 있도록, 할머니들의 삶이 기억하도록 했다. 특히나 지상 2층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역사적, 개인적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박물관은 할머니들의 개인적 삶부터, 역사적 사실까지 다양한 사료들을 수집해놓고 있다.


지상 1층은 색다르다. 위안부 할머니들 이외의 세계 각지의 여성들도 등장한다. 이불을 가득 뒤집어쓰고 두려움에 떠는 눈만 내밀고 찍은 소녀의 사진, 까만 얼굴을 한 앳된 소녀가 아기들을 안고 있는 사진, 두려움에 떨며 딸을 데리고 난민이 되어 떠나는 백인 엄마 사진 등이 걸려 있다. 그 사진들엔 인종의 구별이 없었다. 그저 ‘여성’이 있었고, ‘전쟁’이 있었을 뿐이다.


"죽음의 공포보다 내 딸이 강간당할까 두려웠다.”
“전쟁으로 피난을 떠나던 중에 군인들을 마주쳤다. 그들은 우리 무리에 있던 여자 한 명을 잡아 눕혔다. 그리곤 모두가 바라보는 곳에서 강간했다. 군인들은 ‘조용히 하라’며 우리에게 총을 겨누었다. 우리는 그 여성의 절규를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에도 나는 나보다 내 딸이 저들에게 강간을 당할까 봐 두려웠다. 피난 다니는 동안 딸이 늙게 보이도록, 추하게 보이도록, 병들어 보이도록 갖은 노력을 다했다.”
“집에 돌아가던 중에 군인들에게 납치당해 강간을 당했다. 군인들에게 끌려다니며 수십 차례 강간을 당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도망을 쳐서 ‘강간을 당한 여성들이 모여 있는 안식의 마을’에서 머물렀다. 이곳에서 이 여성들과 함께 살았는데 강간한 군인들이 찾아와선 기분이 나쁘다고 다시 날 강간했다. 그도 모자랐는지, 군인들은 나와 우리 마을의 여자들을 도와주고 있던 우리 엄마도 강간하고 살해했다.”


‘전쟁은 사회적 약자에게 가장 먼저 폭력을 가한다.’
사진 속 여자들이 들려주는 ‘여성’과 ‘전쟁의 끔찍한 기억’을 따라가다 보면 이 구절을 만나게 된다. 전쟁은 사회의 법과 규범이 무너지고 모든 폭력이 허용된다. 상대를 죽이고 짓밟는 등 폭력을 통해 힘의 관계가 생긴다. 이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의 인간다울 권리는 없다.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도 없다. 일본군 위안부에게 그랬듯, 군인들의 ‘위안’을 위해, 효과적으로 군대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서 등 각종 목적으로 여성이 도구처럼 강제로 ‘사용’된다. 전쟁은 그렇게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하는 극악무도한 폭력이다. 이 폭력은 ‘미개한 사회’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국가에서 지금도 전쟁이 일어난 여성들은 강간의 두려움에 떨고 있다. ‘함께 하는’, ‘평화’는 인간이 인간이길 소망하는 사회의 모습이다. 이 박물관은 ‘함께 하는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은 여성들의 아픔을 예술작품으로 승화한 전시가 많다. 저작권의 이유로, 박물관 내부 사진촬영은 금지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그때 그 시절을 작품으로, 사료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직접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 고함20




생존자는 이제 53명뿐이다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집회가 열린다. 1,000회를 넘길 동안 집회는 계속됐다. 그사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 책, 영화 등이 한국을 넘어 세계로 퍼져나가 일본의 범죄에 경악했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역사학자들 187명은 일본 아베 총리에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사과하라는 집단성명’을 발표했다.
아베 총리가 일본의 만행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는 동안에도 고령의 할머니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7명 중 53명만 생존해 있다. 일본이 국제조약을 어기면서 저질렀던 만행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바란다. ‘함께 하는 평화’를 이룩하는 사회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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