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끝나지 않은 히로시마의 저주

  • 입력 2015.06.01 15:21
  • 수정 2015.06.01 15:35
  • 기자명 오주르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다.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20세기 일제 광기의 역사는 지금까지 연장돼 우리들의 몸을 지배하고 있다.





인류 최악의 실험 ‘원폭 투하’
온갖 병에 시달리며 35세 나이로 세상을 뜬 고 김형률 씨는 폐 기능의 70%가 정지된 고통 속에서도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원폭 피해자 2세의 인권을 외치며 이렇게 절규했다. 여름에도 긴팔 옷을 입은 채 숨이 넘어가도록 마른기침을 하던 체중 32kg의 청년은 원폭 2세였다.
1945년 8월 미국은 전쟁의 광기에 사로잡힌 일제를 향해 인류 최악의 실험을 감행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한순간 어떻게 죽어 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폭은 23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때 한국인 7만 명이 피폭을 당했으며, 이중 약 4만 명이 사망했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 온 한국인 피폭 생존자는 2만 5천 명 정도다.
고향으로 돌아온 원폭 1세들 상당수가 원인 모를 병마에 시달렸지만 일본과 미국 정부뿐 아니라 한국 정부도 이들을 외면했다. 수십 년이 지나 1세 대부분은 이미 사망해 2,600명 정도만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세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의 몸을 할퀴는 병마가 아니었다. 선천성 기형과 유전성 질환을 앓고 있는 자식들이었다.


정부는 반세기가 넘도록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제대로 된 실태조사도 이뤄지지 않았다.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원폭 피해자 1세들이 직접 나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부터다. 피폭 1세뿐 아니라 피폭 2세들이 겪는 고통도 컸다. 하지만 일부 언론에 의해 간헐적으로 다뤄졌을 뿐이다.




대물림되는 고통, 정부는 일본 눈치보며 외면
원폭 피해자 김 할머니(언론 취재 당시 대구 대명동 거주/2002년)는 1945년 당시 히로시마 시내의 한 산부인과 간호사였다. 피폭 당시 섬광과 열선으로 화상을 입고 해방 후 귀국길에 올랐다. 1949년에 낳은 첫딸은 허벅지에, 이어 태어난 둘째 딸 역시 팔뚝에 주먹만한 혹이 생겼다. 아들에게서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났다. 병원에서는 원인 불명의 양성 종양이라고 말했지만 김 할머니는 원폭 후유증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이 아무개 할머니의 사 남매 중 세 자녀도 원폭 후유증에 시달린다. 큰 아들은 불임증, 둘째는 정신질환, 막내는 폐결핵을 앓고 있다. 원폭 피해자가 많아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경남 합천에 사는 전 아무개 어르신의 자식 3명은 모두 정신질환을 앓고 있지만 검진조차 받을 수 없는 형편이다.


합천군 봉산면의 최 아무개 씨도 희귀병을 앓고 있는 원폭 2세다. 가슴에 이상하게 생긴 종양을 안고 산다. 원폭 피해자를 어머니로 둔 용주면 강 씨 형제는 정신지체 2급이다. 초계면 문 씨 형제는 원폭 1세인 아버지로부터 후유증을 물려받았다.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다가 스무 살 무렵부터는 시력까지 잃고 말았다.


원폭 1세들에게는 한국과 일본 정부가 원호수당과 일부 의료비를 지원하지만, 원폭 2세와 3세들에게는 아무런 지원이 없다. 게다가 사회적 차별과 편견까지 감수해야 한다. 피폭자 박 아무개 씨의 절규다.


자식들이 나더러 ‘아부지예, 어디 가서 피폭자라고 하지 마이소. 우리 결혼 안 시킬랍니꺼’라고 역정을 내는 통에 자식에게 지장을 줄까 봐 아무 말 몬하겠심더.





한 청년의 절규, 원폭 2세 실태 세상에 알려
병마의 고통에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 보태지는 원폭 2세들. 그나마 이들의 실태가 세상에 알려진 건 한 청년의 절규 덕분이었다. 면역글로블린 결핍증을 앓고 있던 고 김형률 씨는 2002년 3월 자신이 원폭 2세임을 밝히는 ‘커밍아웃 기자회견’을 열어 한일 양국 정부를 상대로 대책마련을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피폭자 2세 환우회’가 결성됐고, 김 씨는 이 단체를 이끌며 2005년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피폭 2세를 위한 인권운동에 매진했다.


이러한 고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무관심은 여전하다. 원폭 2세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조차 안 되는 실정이다. 어느 단체에서는 1만 명이라고 말하고, 다른 기관에서는 4만 명이라고 추정한다. 또 어떤 이들은 8만 명을 넘을 거라고 주장한다. 이런 실정이니 피폭 2세 가운데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실태를 가늠하는 건 불가능할 수밖에.
정부가 피폭자들의 고통이 대물림되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뒷짐만 지고 있다. 일본 정부를 의식해서다. 2011년 헌법재판소가 “국제정세를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 요구되는 외교행위의 특성을 고려한다 해도... 원폭 피해자들의 구제를 외면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원폭 피해, 지워진 역사 아닌 '살아 있는 역사'다
2003년부터 원폭 1세들이 받고 있는 원호수당도 피해자들이 투쟁한 결과다. 징용병으로 히로시마로 끌려간 곽귀훈 씨가 한국인 피해자도 일본 정부가 지급하는 원호수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며 일본 오사카 지법에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함에 따라 가능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제공한 지원과 외교적 도움은 없었다.
그나마 최근에 정부가 한국인 원폭 피해 상황을 알리겠다고 나섰다. 정부는 “2011년 발간한 ‘히로시마·나가사키 조선인 원폭피해 진상조사’를 일본어로 번역해 올해 광복절을 기화로 일본 전역에 배포하겠다.”고 밝혔다. 원폭 투하 70년 만에 이뤄지는 정부 차원의 공식 활동인 셈이다. 그런데 일본어판 발생 부수는 고작 1,000부다. 척만 하려는 모양이다.


원폭 2세들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나 마찬가지다. 국내 유일의 원폭피해자 시설에도 입주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1996년 한일 양국 정부가 기금을 지원해 설립된 ‘합천원폭피해지복지회관’의 경우 원폭 1세들조차 입주가 쉽지 않다. 신청, 심의, 선정, 대기 과정을 거쳐야 가능하다. 시설 정원 110명에 비해 입주 요청이 많기 때문이다. 원폭 2세의 경우 아예 신청조차 할 수 없다.




고 김형률의 절규, "사람답게 살고 싶다"
국회도 마찬가지다. 17대와 18대 국회 때 각각 한 차례씩 ‘원폭 피해자 진상조사 및 지원특별법안’이 발의됐지만 기한 내 처리가 안 돼 자동 폐기 됐다. 19대 국회에도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계류 중이다. 한국인 원폭 피해는 ‘지워진 역사’가 돼 간다. 국내 중고교 역사교과서 29종 가운데 ‘한국인 피폭’ 관련 내용을 다룬 건 두산동아가 출판한 교과서 1종뿐이다.
원폭 투하 70년이 지나도록 정부는 일본의 눈치를 살피며 실태조사조차 쉬쉬한다. 고 김형률 씨가 제기한 ‘원폭 2세 특별법’ 문제는 고인의 10주기가 되도록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억울한 피해자들의 실존적 역사를 '외면'이라는 지우개로 지우려 하다니. 고 김형률 씨는 생전에 이렇게 외쳤다. 이 외침조차 내팽개칠 텐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꼭 지키고 싶다. 귀를 기울이지 않는데도 진실을 밝히려 하는 것은 나와 비슷한 병을 앓고 있는 피폭 2세들의 건강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