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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남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가

  • 입력 2015.05.22 14:14
  • 수정 2015.05.22 14:21
  • 기자명 뉴스페퍼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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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는 자살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드러몬드는 그가 꿈꿨던 모든 것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사립학교 입시에 떨어졌던 이후로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불합격 통지서를 본 아버지와 어머니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아버지는 지금껏 그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와 따로 놀아주지도 않았고, 그가 못된 장난을 쳤을 때 체벌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 시절의 모든 아버지들이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두려움과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사립학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집 앞을 지나갔습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것은 고통이었습니다. 드러몬드는 그가 나온 학교의 교장이 되는 것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죠. 목공일과 미장일을 배우는 기술학교에 겨우 입학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진로 상담선생님은 그가 교사가 되고 싶다고 하자 웃음을 참아내기 바빴습니다.
그러나 드러몬드에게는 야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학생회장에 당선되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드러몬드는 결국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연인과 결혼도 했습니다. 마을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어갔습니다. 아이 셋과 두 대의 자동차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작은 방에 앉아 자살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키워드 : 자살 그리고 남자
충동성, 자신만의 생각에 빠지는 것, 낮은 세로토닌 수치, 사회적 문제 해결능력 부족 등 자살 위험을 높이는 여러 요인들이 있습니다. 국제 자살연구소의 로이 오코너는 지난 20년간 어떤 심리적 상태가 자살에 이르게 만드는지를 연구했습니다.


제가 드러몬드를 처음 만난 날, 자살에 관한 흥미로운 뉴스가 보도됐습니다. 2013년 영국에서만 6,233명이 자살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2007년 이래 여성의 자살률은 일정했지만 남성의 자살률은 계속 증가해 2001년 이래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10건의 자살 중 8건이 남성이며 이 비율은 지난 30년 동안 계속 오르는 추세였습니다. 2013년 20세에서 49세 사이 남자들의 사망요인 중 가장 높은 것은 자동차 사고나 마약 남용, 심장병이 아닌 바로 자살이었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서 남자는 여자보다 더 많이 자살합니다. 왜 그럴까요? 남자라는 사실과 자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또, 가장 자살을 많이 하는 집단이 중년의 남성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이들의 자살률이 계속 올라가는 이유는 왜일까요?
자살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정신질환과 관련된 일을 하는 이들은 보통 이런 가설을 세웁니다. 만약 자살을 예고하는 한 가지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정신질환, 특히 우울증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이죠. 그러나 직시해야 할 사실은, 우울증을 앓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자살을 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 중 자살을 택하는 비율은 5%도 채 되지 않습니다. 즉, 정신병이 자살의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전적으로 심리적인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심리적 상태가 우리를 자살에 이르게 하는 걸까요?




무엇이 우리를 자살에 이르게 하는가
오코너의 자살행동연구소는 자살에 실패한 이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자살을 시도한 지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이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기분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조사합니다. 또한 그들의 고통에 대한 내성이나 스트레스에 대한 인지능력의 변화 등을 실험하기도 합니다.
수년 간의 연구 끝에 오코너는 놀랄만한 결과를 발견했습니다. 자살의 원인에는 사회적 완벽주의(social perfectionism)가 존재했습니다. 이는 왜 남자들이 그렇게 많은 자살을 감행하는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드러몬드는 스물두 살에 갈색 눈의 리비와 결혼했습니다. 1년 반 후 그는 아빠가 되었고 곧 두 아들과 딸 하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생활은 힘들었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낮에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밤에는 술집에서 바텐더를 했습니다. 금요일 밤에는 저녁 6시부터 새벽 6시까지 볼링장에서 일했습니다. 토요일 낮에 잠시 눈을 붙인 후 토요일 밤에는 다시 볼링장에 가야 했습니다. 일요일 낮에는 술집에서 일했고 월요일부터는 다시 학교에 나갔습니다. 그는 아이들과 지낼 시간이 충분치 않았지만 그에게는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일을 하는 사이사이 교장이 되기 위한 자격 시험을 위해 공부했습니다. 그의 야망과 함께 그의 처지도 나아졌습니다. 그는 더 큰 학교에 자리를 얻었고 더 큰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는 성공한 가장이자 완벽한 남편으로 인정받을 만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내게 완벽할 것을 요구한다
사회적 완벽주의자(social perfectionist)는 자신이 맡고 있다고 생각하는 역할과 책임을 면밀하게 분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자신의 모습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만약 좋은 아버지나 좋은 형제가 되지 못한다면 이들은 다른 사람을 실망시킨 것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아버지가 어떤 것인지와는 무관하게 말이죠.
오코너는 미국 대학생들에 대한 연구에서 이 사회적 완벽주의를 처음 목도합니다.

“나는 그 결과들이 미국과는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이곳 영국 사람들에게서는 발견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글래스고의 가장 열악한 환경의 사람들에게서도 같은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2003년 이들은 22명의 자살시도자들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이런 질문들었습니다.


1. 성공이란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사람들은 내게 완벽할 것을 요구한다.

당신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실 겁니까?


“우리는 모든 계층에서 사회적 완벽주의와 자살의 연관성을 발견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건 부유한 사람이건 말이지요. 우리는 사회적 완벽주의자가 실패에도 더 민감하기 때문에 자살에 더 쉽게 이르게 된다는 가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연관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실패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역할에 대한 실패인지를 물었습니다. 아버지로서의 역할일까요? 아니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의무일까요?

"오늘날 사회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제 남자들은 다양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남자들에게 더 많은 기대가 있고, 따라서 남자가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더 커졌다는 뜻이지요."





오늘도 어딘가에서 한국인 40명이 목숨을 끊고 있다
다른 사람의 기대와 그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을 때 느끼는 열패감의 영향은 오늘날 자살률이 급격히 올라간 아시아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자살률이 높은 한국이 그 대표적인 지역입니다. 2011년 조사 결과 한국에서 하루 평균 40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2014년 정부산하의 한국건강증진재단 조사에 따르면 10대 절반 이상이 지난 1년 동안 자살을 생각해 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인하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 김의철 교수는 한국의 높은 자살률의 이면에 급격한 성장과 도시화가 낳은 고통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60년 전 한국은 지구 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당시의 한국을 2010년 지진을 당한 아이티에 비유합니다.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오늘날 90%가 넘는 비율로 도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2,500년간 지속되어오던 유교의 영향을 받은 소규모 농경 사회에 적합한 가치관과 문화를 붕괴시켰습니다.

“협력과 협동이 중요했습니다. 서로 돌보고 나누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의 삶은 치열한 경쟁과 성과 중심의 연속이죠.”

성공의 개념이 뒤바뀐 것입니다. 한국은 이제 자신의 지위, 권력, 부가 곧 자신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문화에서는 중요시 여기지 않았던 것들이죠. 왜 이런 변화가 나타났을까요? 김의철 교수는 이런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농사를 짓던 유학자들은 매우 현명했으나 동시에 가난했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고 싶었고, 결국 근본 없는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죠. 과거에 대한 존중이 사라졌습니다.”

한국은 성공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OECD 국가 중 가장 긴 노동시간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쉽게 바뀔 것 같지 않습니다. 입시에 실패한 10대는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여기기 쉽습니다. 실제로 한국의 대표적인 3개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대기업에 입사할 가능성이 매우 낮아집니다.

학생들이 그저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뛰어난 학생은 교사와 부모, 친구들로부터 존중을 받습니다. 인기를 끌게 되고 이성으로부터도 호감을 얻습니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이 정도 수준의 완벽함을 달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엄청납니다. 자존감, 사회적 존중, 사회적 위치 등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패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요?




일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드러몬드는 아르바이트와 공부 외에도 다양한 자원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더욱 줄어 들었죠. 아내는 그가 일을 너무 많이 한다고 불평하곤 했습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느낌이라고도 말했습니다. 학교를 바꿔가며 자주 이사를 다녔지만 그녀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당신 경력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드러몬드가 그녀의 부정을 처음 발견한 것은 그가 지역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할 때였습니다. 한 여성이 그에게 편지뭉치를 건넸습니다. “당신 아내가 내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요.” 그들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편지들은 아내가 그 남자에게 완전히 빠져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드러몬드는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만났습니다. 아내는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편지들 모두 그녀가 직접 손으로 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드러몬드는 아내와 헤어질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어렸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는 그녀를 용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드러몬드는 주말을 이용한 강좌를 듣기 위해 종종 집을 비웠습니다. 하루는 아내의 자동차 휠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동네 경찰이 갈아줬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가 매우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뒤, 11살 난 딸이 엄마가 그 경찰과 침대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말이죠.
아내의 다음 연인은 제약회사 세일즈맨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때 가출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2주 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드러몬드는 이 모든 일을 그저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 일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없었습니다.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부인이 부정을 저지른다는 건 다른 사람에게 고백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리고 아내는 드디어 결별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결국 이혼했을 때, 아내는 위자료로 많은 것을 가져갔습니다. 집 그리고 아이들. 드러몬드에게 남은 것은 많지 않았습니다. 생활이 어려워졌지만, 누구도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드러몬드는 여전히 성공한 교장이자 3명의 귀여운 아이를 가진 존경스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의 이혼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러몬드는 파산했습니다. 집을 구할 돈이 없어 마을에서 2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난방이 되지 않는 작은 방을 빌려 살아야 할 정도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게 한 건 남자로서의 위신이 떨어졌다는 열패감이었습니다. 주변 시선이 곱지 않은 것도 한 몫 했습니다. 드러몬드는 부인을 바람나게 한 무능한 남편이자 다른 이의 기대를 저버린 한심한 남자였습니다. 의사는 그에게 몇 가지 약을 처방해 주었습니다. 드러몬드는 생각했습니다. 이 답답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라고.




남자는 자신의 실패를 말하지 않는다
사회적 완벽주의자는 스스로 자신에 대해 비정상적으로 높은 기대를 요구하고 이에 실패할 때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자신의 목표나 역할, 열망에 집착하는 이들이 사회적 완벽주의자만은 아닙니다. ‘개인 계획(personal projects)’ 연구로 유명한 캠브리지 대학의 심리학자 브라이언 리틀은 우리가 자신의 계획을 곧 자기자신으로 여길 때 역시 자신의 목표와 역할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버드 수업에서 종종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여러분들이 가진 계획이 곧 여러분들입니다.”

리틀에 따르면 세상에는 다양한 계획(projects)이 존재하고 각각은 서로 다른 가치를 지닙니다. 개를 운동시키는 것, 교장이 되는 것, 성공적인 아버지와 남편이 되는 것 모두 개인 계획에 속합니다. 놀랍게도 이 계획들이 얼마나 의미 있는 것인지는 자신의 행복에 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 계획이 성취 가능한 것인가가 우리의 행복에 훨씬 더 큰 영향을 줍니다.
이런 개인 계획이 실패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우리는 여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혹시 대처 과정에 남녀 간의 차이가 발생하고, 이 때문에 남자가 여자보다 더 많이 자살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남자가 자신의 실패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감정적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어려워한다는 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개인 계획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리틀은 그의 책 『나, 나 자신 그리고 우리(Me, Myself and Us)』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여성들은 자기 계획의 현재 상황과 어려움을 밝히려 하는 반면, 남성들은 이를 숨기려 하는 경향이 있다.”

고위 임원들에 대한 연구에서 리틀은 또 다른 명백한 남녀 간의 차이를 발견했습니다.

“남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장애물을 맞닥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우선시 합니다. 반면 여자들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 곧 조직의 분위기를 가장 우선시합니다. 이들이 사무실 바깥의 인생에서도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을 수 있겠지요. 나는 스테레오타입(고정관념, 뚜렷한 근거 없이 감정적으로 판단을 내리는 것)을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조사결과 이는 매우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남자에게 자살이란 스스로에게 내리는 처형이다
UCLA의 셀리 테일러가 2000년 발표한 스트레스에 대한 생물-행동학적 반응 연구 역시 이 결과를 지지합니다. 이 연구에서 남자들은 ‘투쟁 혹은 도피(fight or flight)’ 반응을 보이는 반면, 여자들은 ‘배려와 친교(tend and befriend)’ 반응을 보였습니다.

“여성들 역시 자살을 매우 진지하게 고려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회적 관계 때문에, 곧 ‘애들은 어떡하지? 엄마는 어떻게 해?’와 같은 생각을 떠올림으로써 자살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지 않게 됩니다. 반면, 남자들에게 죽음은 ‘도피(flight)’의 궁극적인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도피의 극단적 형태는 결심을 필요로 합니다. 플로리다 주립대학의 토마스 조이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이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모든 자살시도자는 반드시 자신의 목숨을 끊겠다는 듯이 행동하지만, 당연하게도 마지막 순간 두려움으로 인해 자살을 주저합니다. 그리고 그 주저함이 결국 그들의 목숨을 살리죠. 대게 여성들이 이에 속합니다. 비교적 남자들이 덜 주저하고, 자살에 성공하죠.”

실제로 서구에서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많이 자살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자살자는 남자들이 많죠. 남자들은 목을 매거나 총을 사용하는 반면, 여자들은 약을 먹고 자살하려 합니다. 실패 가능성이 더 높은 방식입니다. 자살방지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인 사마리탄의 심리학자 마틴 시거는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로 남자들의 자살 의도가 더 분명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택하는 방법이 곧 이들의 심리를 반영한다는 것이죠. 옥스포드 대학의 심리학자 데니얼 프리먼도 자해를 시도했던 환자 4,415명에 대한 연구에서 역시 남자들의 자살 의도가 훨씬 더 높았다고 밝힙니다. 물론 이 가설은 아직 증명된 게 아닙니다.
오코너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답을 못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거는 이를 확신하죠.

“남자들에게 자살은 곧 처형과 같습니다. 곧, 자신을 세상에서 제거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패배감과 부끄러움만이 이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남성은 다른 이들을 보호하고 아끼며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는 책임을 느낍니다. 여자들 역시 직장을 잃었을 때 이를 고통스러워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자아나 여성성을 잃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반면 남자들은 직장을 잃었을 때 자신이 더 이상 남자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이는 유명 심리학자 로이 바우메이스터의 이론인 자살이 곧 ‘자신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립니다. 자신의 가족을 책임질 수 없는 남자는 더 이상 남자가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죠. 여자는 어떤 경우에도 여자이지만, 남성성은 사라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부계 사회에서 모든 책임은 아버지의 몫이다
중국에서 부패한 공무원이 자살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이는 감옥에 들어가는 것과 치욕을 피하기 위한 것이지만, 또한 가족을 불명예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습니다. 인하대학교 김의철 교수는 한국에서는 수치심이 자살의 주요 원인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한국과 다른 나라와의 차이입니다. 아틀랜타 에모리 대학의 인류학자 치카코 오자와-데 실바는 일본의 경우 한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바침으로써 명예가 회복되거나 또는 가족이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김 교수는 다른 이들의 시선이 또 다른 짐으로 작용한다고 말합니다. 수치심은 그 사람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유교 사회에서는 범죄자의 3대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서구보다 자아에 대한 관념(sense of self)이 불분명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속한 다양한 그룹으로 쉽게 확장됩니다. 이는 다른 이에 대한 책임감을 더욱 크게 느낀다는 사실을 말해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자살을 더 진지하게 고려하게 됩니다.
오자와-데 실바는 일본의 경우 자아는 곧 그의 사회적 역할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 앞에 직업을 붙여 소개한다고 말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데이빗이라고 합니다’ 대신에 ‘안녕하세요, 저는 소니에서 일하는 데이빗이라고 합니다’가 되는 것이죠. 아주 가벼운 만남에서도 사람들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러나 경기가 나빠질 때 이런 직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자살은 수십 년, 아니 수세기 동안 도덕적 가치를 가진 행동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아마 사무라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회사를 가족처럼 생각하거나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합니다. 부도 처리된 회사 대표가 ‘이 회사를 내가 책임지겠습니다’와 같은 말을 하며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일이 벌어지는 게 그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이 언론에서 명예로운 행동으로 보도되곤 합니다. 일본의 자살율은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높습니다. 2007년 일어난 자살 중 3분의 2가 남자들이었습니다. 부계 사회에서 책임은 당연히 아버지의 몫이니까요.




미래에 대한 희망 그리고 좌절
중국은 90년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가진 국가였지만 지금은 반대로 자살률이 낮은 국가 중 하나입니다. 지난 해, 홍콩대학 자살 방지 연구소의 폴 입은 중국의 자살률이 90년대 10만 명당 23.2명에서 2009-2011년에는 9.8명으로 떨어졌다고 밝혔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자살률의 하락이 바로 한국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대규모 이농현상이 발생한 시기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 효과가 반대로 나타났을 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김의철 교수는 중국이 지금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으로 ‘일시적인 안정(lull)’을 누리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자살률은 반드시 오를 겁니다.” 그는 한국 역시 70년대와 80년대, 경제가 급격히 성장할 때 자살률의 감소를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습니다. 목표가 있을 때 사람들은 자살을 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표에 도달했을 때 그 목표가 내가 기대하던 그런 것이 아니라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사실 오코너가 글래스고에서 발견했던 것처럼 희망 없는 곳에서 희망을 가지는 것은 때로 위험한 일일 수 있습니다. 오코너는 자살을 시도한 388명을 연구했고 15개월 뒤 그들이 다시 자살을 시도했는지를 보았습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희망적 사고를 가진 이들이 자살을 재시도하는 비율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던 반면, 우리는 이 희망적 사고가 오히려 그 사람의 재범율을 예측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즉 미래에 대한 기대 등 희망적 사고를 하는 이들이 오히려 자살을 시도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희망적 사고가 위기 상황에서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그 희망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날 경우 ‘나는 이 목표들을 영원히 이루지 못 할거야’라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죠.




‘진짜 남자’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2014년 마틴 시거와 그의 연구진은 미국인과 영국인을 대상으로 남자 혹은 여자가 된다는 게 문화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적어도 남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기대에 있어서는 50년대에 비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남자에게 기대되는 첫 번째 원칙은 싸움을 마다하지 않아야 하고, 그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원칙은 다른 이들을 돌보고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죠. 세 번째 원칙은 언제나 상황을 지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원칙들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은 남자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진짜 남자’는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도움을 청하는 남자는 놀림거리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 결론은 오코너가 2012년 남성의 자살에 대한 사마리탄 보고서에 작성했던 내용과 놀라울 만큼 유사합니다.

“남자들은 자신을 힘과 권력을 가진 완벽한 이상형의 남자와 비교합니다. 자신이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수치심과 패배감을 느끼게 됩니다.”





당신도 사회적 완벽주의자다
80년대 중반을 위시해 서구사회에서는 남자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성평등과 여성의 성적 안전을 위한 오랜 투쟁이 남자를 기득권자 및 폭력주의자로 묘사한 것이 그 한 가지 이유입니다. 오늘날의 남성상 중 몇몇은 이런 부정적 남성상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허영적인 메트로섹슈얼(패션과 외모에 관심을 보이는 남성)이나 식기세척기조차 다루지 못하는 무능한 남편 말이지요.


남자들은 이제 더 이상 지배하고, 이끌고, 싸우고, 침묵 속에서 모든 일을 해결하고, 친구와 가족에게 들일 시간 없이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이런 과거의 기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성향을 드러내는 것은 오히려 부끄러워할 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남자들에게 무엇이 남았는가입니다. 사회는 진보했지만, 남자들이 성공과 실패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우리의 본능 속에 숨어 있는, 그리고 문화적으로 강화되어 왔던 이 감정을 없앨 수 있을까요?
오코너와 이야기하는 동안 저는 10여년 전 자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의사에게 우울증 약을 부탁했던 기억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때 그 의사는 “그냥 호프집에 가서 좀 즐기세요.”라고 내게 말했습니다. 제 고백에 오코너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깜짝 놀랐습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게 겨우 10년 전이라고요?”
“정신적으로 힘들 때 약물 치료를 받아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아내가 어떻게 생각할지도 걱정되었죠.”
“부인과 여기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이 있나요?”

저는 잠시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아뇨. 저는 제가 이런 문제를 쉽게 털어놓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저도 그저 평범한 바보 같은 남자(crap)였을 뿐이네요.”
“그런 게 바보 같은 남자가 아니라는 거죠. 이 부분이 핵심이에요. 이야기가 ‘그런 남자는 바보 같다’로 바뀌어 버리죠. 그렇지 않아요. 본능을 바꾸는 건 불가능해요. 오해는 말아요, 이를 조절할 수 있으니까요. 내 말은 이 사회가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거에요. ‘어떻게 하면 남자들이 부담 없이 진료를 받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남자들이 도움을 받으면서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같은 질문 말이에요.”

그는 2008년 자신의 친한 친구가 자살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었죠. ‘왜 나는 그걸 몰랐을까? 나는 수십 년 동안 이 일을 해왔잖아?’ 저는 그녀의 자살에 책임이 있다고 느꼈고, 그녀의 주변 사람들에게도 책임을 느꼈어요. 그리고 내가 실패자라고 느꼈죠.
이처럼 저도 사회적 완벽주의자입니다. 저 역시 사회적 비판에 매우 민감해요. 물론 저는 그걸 잘 숨기지만요. 저는 비정상적으로 다른 이들을 기쁘게 하고 싶어 하죠. 혹시 다른 이들을 실망시키진 않을까 두렵습니다.”

다시 드러몬드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그는 자신의 약을 보며, 이 약을 모두 입에 털어 넣을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구원한 것은 다름 아닌 그가 자원봉사로 일했던 사마리탄이었습니다. 그는 오랜만에 그곳에, 다른 이들의 고민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고민을 말하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드러몬드는 재혼했습니다. 아이들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가 이혼한 지 벌써 30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당시 일은 그에게 여전히 고통스러운 기억입니다. 드러몬드는 그때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남자라면 그런 일은 알아서 처리해야죠. 좋지도 않은 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필요 있나요. 그래선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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