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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애인을 죽이지 않았다’, 한 경찰의 누명

  • 입력 2015.05.12 14:53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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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한 여인이 모텔에서 살해당한 채로 발견됐다. 수사 방향은 두 가지였다. 강도에 의한 것, 또는 면식범에 의한 치정살인. 그런데 살해당한 여인은 현직 순경의 애인이었고 신고자는 김모 순경 자신이었다. 김모 순경은 전날 모텔에 함께 투숙한 뒤 아침 일찍 근무를 7시경 근무를 나갔다 고 하고, 10시경 되돌아와보니 애인이 죽어 있었다고 신고한 것이다.
부검 결과 김모 순경의 증언은 부인된다. 부검 결과 사망 시간이 새벽 3시에서 5시로 추정된 것이다. 즉 김순경이 애인과 함께 모텔에 있었던 시간이었다. CCTV를 틀어보니 김순경이 모텔을 나간 시간은 그의 증언대로 7시였다. 경찰은 그 부검 결과를 들이대며 김순경을 용의자로 몰기 시작했다.
경찰은 사흘에 잠을 세 시간 가량 밖에 재우지 않으면서 자백을 강요했다.

시체가 말을 해 주는데 왜 거짓말을 해. 너 7시에 나갔다며. 니 애인은 최소 5시에 죽었어. 빨리 불어." 그리고 협박과 회유를 번갈아 했다. "너 시경 강력계에 넘어가면 죽음이야. 그나마 한솥밥 먹은 우리한테 불어. 모든 정황과 증거가 불리하니 20년 징역도 기본이야. 하지만 빨리 시인하고 유족하고 합의하면 집행유예도 가능해.

김순경은 버티다 못해 견디다 못해 자신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하지만 서울 시경 강력계에 넘어가서 다시 혐의를 부인하게 된다. 서울 시경 강력계에 넘어가면 죽음이라는 동료 경찰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수갑을 뒤로 채워 의자에 앉히고 거의 나흘 동안 잠을 못 자게 하는 등 고문에 가까운 심문으로 자백을 받아 냈다.
검찰도 마찬가지였다. 검찰은 "처음에 자살로 신고했고, 가족이 있는 자리에서도 범행을 인정했으며, 현장 검증까지 했다."며 기소를 밀어부쳤다. 자살로 신고한 것은 겁이 나서였으며 범행을 인정한 것은 담당 형사의 고문 협박 때문이었다는 김순경의 항변과 현장 검증을 저 좋아서 한 건 아니라는 객관적 사실은 깔끔하게 무시된다. 판사 또한 비슷했다. 물증 없이 자백 밖에 없는 사건이었지만 판사들은 범인이 김순경임을 선언했다. 징역 12년이 김순경이 받은 형량이었다. 1심과 2심 모두에서였다.
하지만 김순경이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곳곳에 있었다. 모텔방에서 다른 남자의 정액이 묻은 휴지가 발견됐고 침대 위에서 다른 남자의 발자국도 나왔다. 피해자의 지갑에서 수표가 사라졌지만 경찰은 수표의 사용처를 추적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망 시간은 어디까지나 '추정'이었지 '확정'은 아니었다. 김순경이 범인이 아니라는 정황도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깡그리 무시되었던 것이다.
3심이 진행 되던 중 반전이 일어났다.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힌 서모군(당시 18세)이 취조를 받던 도중, 자신이 작년에 있었던 경찰관 애인 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자백한 것이다. 실제 사건은 사망 추정시각인 오전 3시에서 5시 사이가 아니라 오전 7시에 김모 순경이 여관을 나간 직후, 서모군이 여관방에 침입해 혼자 자고 있던 애인을 강간하고 살해한 뒤 금품을 빼앗아 도주한 것이 사건의 진상이었다.
서모군은 피해자의 수표를 사용했던 것으로 드러났고, 범인이면 알지 못할 현장 상황을 진술했다. 그리고 또 하나 결정적으로 김순경을 옭아맸던 사망 추정 시각은 검시의가 시신을 보고 작성한 것이 아니라 경찰의 보고 내용을 토대로 검시 보고서를 작성함으로써 발생했던 오류였다. 10대 강도범의 자백 하나에 경찰, 검찰 그리고 "여러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피고인의 범죄 사실은 살인의 고의를 포함하여 충분히 인정할 수 있고, 기록을 살펴 보아도 원심의 사실인정 및 판단 과정에 아무런 위법을 발견할 수 없다"고 판시한 재판부까지 하루 아침에 바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1994년 5월 11일 김순경은 경찰에 복직했고 연고지인 수원에 배치돼 근무를 시작한다. 아니할말로 그쪽 방향으로 오줌도 누기 싫을 처지였겠으나 그는 경찰 복직을 원했다. 이유는 감옥 안에서 겪었던 사람들이었다.

열 사람의 범인보다 한 사람의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사법기관의 일이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수형 생활 중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20 여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탄원서를 써 주며 과연 진실은 어디에 있는지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 이들을 돕기 위해 경찰을 하고 싶다.

한 청춘을 지옥으로 몰아넣을 뻔 했던 대한민국이 김순경에게 어떤 보상을 했는지, 그리고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여 협박하고 으르댔던 이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김순경이 지금까지 꿋꿋하게 과거의 다짐대로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서 애쓰는 경찰로 살아가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유죄로 추정할 증거가 없으면 무죄"는 형사 사건에서는 포기할 수 없는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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