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의지의 친일파 박중양 죽다

  • 입력 2015.04.23 15:11
  • 기자명 김형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얼마 전, 나는 뭔 일이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 사람은 존경 받을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끄적인 바 있다. 헌데 이 인물을 떠올리면 그 말을 박박 지우고 싶은 생각이 든다. 1959년 4월 23일 당시로서는 징하게도 장수한 나이인 여든 일곱에 생을 마감한 박중양이라는 사람이 그다. 그는 일제 시대 각 도지사 및 중추원 참의를 지낸 최상위급 친일파다. 하지만 그는 시류에 편승하여 어쩔 수 없이 친일을 하거나 윤치호처럼 친일을 하면서도 그 반대편에 대한 애정을 거두지 못했던 회색분자와는 거리가 천만리 떨어진, 그야말로 신념에 찬 친일파였다.


고종이 보낸 홍종우가 김옥균을 암살하는 장면

개화의 소용돌이가 조선을 몰아칠 무렵, 그는 똑똑한 젊은이였고 세상 물정을 잘 알았다. 나라가 이렇게 돌아가면 안 된다고도 생각했고 개화파에 기대를 걸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조선이라는 나라를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사태가 찾아 든다. 망명 중이던 김옥균이 자객에게 사살되어 그 시신이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것이다. 유약하고 서글픈 망국의 군주로 이미지 메이킹이 되어 있지만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은 매우 집요하고 잔인한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박중양(1874∼1959). 일제강점기 때의 친일파.

고종은 김옥균을 죽이러 연달아 자객을 파견했고 마침내 성공하여 그 시신이 돌아오자 노량진 백사장에서 그 시신을 토막 내어 종로에 내건다. 이미 열강 각국과 수교를 한 처지로 외국인들도 자신들과 건배하며 조선의 앞날을 논하던 잘생긴 조선 청년 관료가 시신이 되어 당하는 꼴에 치를 떨었을 테지만, 약관 나이의 박중양은 분통을 터뜨린다.

“이런 짓은 야만인보다도 못하다.”

한 번 삐딱한 눈에는 모든 것이 삐딱해 보이는 법이다. 조정래의 어느 소설에 보면 오물로 그득한 기찻간 변소에서 한 조선인이 “조선놈들은 하여간 더러워!” 식으로 얘기하면서 자신도 변기에 오줌을 누지 않고 멀찌감치 떨어져 오물을 쌓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박중양은 이 야만적인 나라에 대한 혐오감을 덕지덕지 쌓아 나간다.

“이런 나라가 존재할 가치가 있을까?”

관비(官費)로 일본 유학길에 만난 이토 히로부미는 그의 이후 일생을 규정하는 이가 된다.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게 되는데 제 잘난 맛에 살며 조선인을 괴롭히는 동료 일본인 학생들과는 달리 이토 히로부미는 어떠한 차별도 없이 박중양을 대해 주었고 박중양은 이에 감읍한다. 그런데 자신을 유학 보낸 나라 정부는 역적 박영효가 일본에 있다는 이유로 자객을 파견하여 (박영효를 찾기 위해) 유학생들 꽁무니나 쫓고 있다는 걸 알고는 더욱 정나미를 떨어뜨린다. ‘왜? 또 죽이고 시체 끌고 가서 토막내려고? 이 야만종들.’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는 하늘같이 모시던 이토 히로부미의 부인이 물에 빠졌을 때 몸을 돌보지 않고 뛰어들어 그녀를 구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감격하여 사례를 하려 하자 단호히 사양하며 받지 않는다. 거기다 놀자판이던 일부 유학생들과는 달리 똘똘하고 영민한 모습까지 갖춘 조선 유학생에게 이토는 열렬한 신뢰를 보내게 된다. 이토의 양자라고까지 소문이 났지만 박중양에 따르면 ‘은사’였지 ‘양아버지’는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박중양은 해방된 뒤에도 이토공(公)이라고 입에 달고 다녔으니 양아버지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약육강식의 국제 사회에서 ‘사기와 거짓말에 능하며 사람 봐가면서 뒤통수를 치는 것과 도벽과 허세가 심한’ 조선 사람들은 ‘신의 있고 성실하며 힘 있는’ 일본인들의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점차 그의 신념이 되어 갔다. 조선인이었지만 그는 일본인이었다. 대구 군수를 지낼 때 그는 정부의 반대를 무시하고 대구 성곽을 허문다. 성곽 때문에 조선인 상권을 넘보지 못했던 일본 상인들의 요구에 응해서였다. 그가 타 지역으로 이동할 때 일본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전송할 정도였다.
그는 후에 3.1운동이 벌어지자 ‘자제단’을 조직하여 3.1운동의 확산을 막았다. 그의 생각은 단순했다. “국민이 독립적으로 생활할 능력이 없으면 국가가 부강할 도리가 없다. 독립만세를 천 번 만 번 외친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다. 만세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즉 그가 보기에 만세 군중은 쥐뿔도 없는 것들의 집단 최면에 불과했다. 그리 세상을 깔아볼 수준은 아니었다 해도 박중양은 똑똑한 사람이었고 유능했고 그만한 힘을 과시했다. 일본인 관료들이 우습게 놀다가는 박중양한테 박살이 났다.
그 별명이 ‘박작대기’였던 바 웬만한 일본인들은 물론 하늘같은 판사 정도는 지팡이 끝으로 가리키며 “자네 왔나?”고 물을 수 있던 조선 천지에서 몇 안 되는 조선인이었다. 오늘날 속리산 말티재 길은 그가 충북도지사 시절 법주사에 오르다가 고갯길에 차가 멈추자 당장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라고 호령하는 바람에 생겨난 것이다.


해방 직후 영합군을 환영하기 위해 서울역 앞에 모여든 인파

해방이 왔다. 웬만한 사람들은 납작 엎드려 죄상을 빌거나 이광수 같이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라고 못난 소리를 하고 앉았을 때 그는 초지일관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잘나서 독립이 된 것이 아니라 미군이 일본을 쳐서 우연히 독립된 것이며, 미국과 일본이 전쟁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독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사람들의 약을 바싹 올리는 것은 기본, 해방 공간의 좌우대립을 보면서 ‘독립할 자격’을 논하며 비웃기도 했다. 여기에 열 받은 사람들이 성토를 하거나 간혹 멱살을 잡아올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는 악을 썼다.

“표리부동한 위선자들이 우글거리는 이런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러니 시원하게 죽여라.”

3.1절 기념식에 일제 시대의 관헌들이 축사를 하는 것을 보고는 가가소소했고 니들 중에 창씨개명 안 한 놈 나와 보라고 염장을 질렀다.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던 자들이 3.1절 의식에서 떠들고 있는 것이 가소롭다.”

그런데 슬픈 것은 그의 조롱이 상당 부분 틀린 말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이승만 같은 건 미군만 나가면 봇짐 싸느라 바쁠 것”이라고 낄낄댄 것은 흡사 예언과도 같지 않았던가.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 등을 조롱하다가 기소되기도 하고 정신병원에도 가지만 그 뜻을 굽히지 않는다.
그는 일생에 단 한 번도 자신의 뜻을 바꾸거나 시세에 영합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죽하면 조지훈의 수필 지조론에서 이렇게 묘사될까.

“자기 신념으로 일관한 사람은 변절자가 아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치욕에 김상헌이 찢은 항서를 도로 주워 모은 주화파 최명길은 당시 민족 정기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으나, 심양의 감옥에 김상헌과 같이 갇히어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얘기다. 최명길은 변절의 사가 아니요 남다른 신념이 한층 강했던 이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누가 박중양, 문명기 등 허다한 친일파를 변절자라고 욕했는가. 그 사람들은 변절의 비난을 받기 이하의 더러운 친일파로 타기되기는 하였지만 변절자는 아니다.”

이걸 읽으면서 박중양 뭐 그런 새끼가 다 있었나. 북한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죽창에 찔려 죽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한 남한의 친일파 세상에 비분강개할 수도 있는데, 나는 그에 공감하면서도 일면 그의 초지일관의 이유와 그의 생각의 흐름이 궁금하다. 그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무일푼으로 떠난 일본 유학 때부터 반민특위에서 그 일기장을 압수하기 전날까지 일기를 썼다. 이 일기가 출판되었는지 모르겠는데 윤치호의 일기와 더불어 나는 이 일기의 내용이 몹시도 궁금하다. 독립운동사의 감동만큼이나 그의 기록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많을 것 같으므로.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