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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군대는 가야 한다'는 숙맥 조카

  • 입력 2015.04.22 15:24
  • 기자명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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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각종 의식에서 국민의례를 할 때, ‘국기에 대한 맹세’가 나오면 속으로 가끔씩 '나라가 백성들에게 억지 충성심을 강요한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물론 태극기를 바라보면서 무언가 거룩한 상념에 빠지는 일도, 용솟음치는 애국심을 가누지 못하는 일도 전혀 없다.
그러나 나는 내가 평균적인 한국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애국심이나 민족의식은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스물두 살에 영장을 받고 입대하여 33개월 동안 현역으로 복무하고 만기 전역했다. 그리고 예비역으로서 주어진 훈련을 한 번도 빼먹지 않고 수행했으며 이어서 민방위 대원으로서의 의무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맏형님을 비롯해 우리 집 삼형제 모두 군대를 다녀왔고 우리 아이는 물론이고 조카들 셋도 모두 현역 또는 보충역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 남자가 성년이 되면 군대에 가는 건 우리네 삶에서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였다. 스무 살이 넘은,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청년이 군대에 가지 않고 배길 도리는 없는 것이다.


군대는 마땅히 '가야 하는 곳'
청년의 일상도 그 ‘국방의 의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20대 청년들 사이에서는 으레 입영 시기나 병역필 여부가 중심화제가 된다. 또 ‘병역필’ 여부는 성년 남자가 사회 구성원 자격을 얻는 일종의 선행 요건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청년들은 각자가 겪은 ‘군대의 추억’을 통해 동년배로서의 동질감을 확인하기도 하는 것이다.

신체검사는 받았는가?

군대는 언제 가는가?

군대는 갔다 왔는가?

부모들은 부모들대로, 자식들은 자식들대로 이런 ‘국방의 의무’를 피할 수 없는 절차로 인식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것을 전제로 논의를 전개한다. 군대는 으레 ‘가는 곳’이어서 어쩌다 특별한 사유로 ‘면제’ 받은 친구들의 경우는 자기와 무관한 '특수사례'로 여길 뿐이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의 한 장면

면제 사유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사람들은 면제를 ‘건강한 장정으로서의 결격사유’쯤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런 인식은 당사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왕 가는 군대, ‘1급’ 판정을 받는 게 훨씬 마뜩한 일이다. 요즘은 없어졌지만 한때 ‘보충역’을 일러 ‘×방위’라고 불렀던 것은 그런 의식의 반영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유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보충역’이라면 어디가 ‘덜 떨어진’, 뭔가 ‘시원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려는 의식이 강했다. 보충역 출신의 청년들이 군대 이야기에 스스럼없이 잘 끼지 못하고 외도는 까닭도 거기 있었던 것이다.
물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군대를 피하려는 사람이 주변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글쎄,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어떤 친구는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정리하는 방식으로 면제를 받았다고 했다. 또 한 친구는 발가락을 하나 잘랐다고 했는데 나는 신체를 훼손해가면서까지 군대를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데 머리를 갸웃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런 보통사람들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씩 할 때가 있다.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라는 이들과 이들의 자식들이 이런저런 사유로 병역을 면제 받고 있다는 걸 확인하면서다. 우리나라의 기득권 계급들이 병역의 ‘의무’조차도 '특권'으로 피해간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긴 하다.


모두에게 해당되지는 않는 그 ‘의무’
고위 공직자의 능력과 도덕성을 검증하는 인사청문회 등에서 드러나는 것은 병역의 의무가 반드시 만인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신성한 의무 따위는 만만한 백성들의 것이지 돈과 권력을 두루 갖춘 기득권 세력들의 것은 결코 아니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인 병역이 이들에게는 얼마든지 피해갈 수 있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2013년, 국무총리 후보로 내정됐던 김용준 후보

지난 2013년, 박근혜 정부가 지명했던(그는 이 문제로 낙마했다.) 국무총리 후보의 두 아들이 병역 면제를 받은 사실을 두고 논란이 점화된 바 있다. 아들이라면 몇이든 숫자대로 군대에 가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반 국민들에겐 하나도 아니고 두 아들 모두 병역을 면제 받았다는 사실은 일종의 경이다. 신체 건강한 백성의 아들에게는 남의 얘기인 면제가 이들에게는 아주 손쉽게 주어진 것이다.
새삼스럽게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들, 그 자제들의 병역 면제 비율 따위를 확인할 필요도 없다. 천안함 사태 때 청와대 지하벙커에서 열린 안보장관회의 참석자 18명 가운데 15명이 병역 미필자였다는 이야기는 병역과 관련한 대한민국의 풍속도를 상징하는 장면이었지 않은가 말이다.
보통사람들에겐 군대는 ‘가야 하는 곳’이고 ‘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곳’, 그래서 피할 수 없는 독배 같은 것이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은 ‘가지 않을 수도 있는 곳’이거나 ‘안 가도 되는 곳’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져야 할 의무조차 사회적 지위에 따라 일그러지고 있는 게 이 나라의 현실인 것이다.

서민들이 일상에서 화제로 삼는 병역과 관련된 이야기는 ‘가는 것’을 전제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득권들의 그것은 ‘가지 않는 것’을 전제로 삼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다. 이를테면 그들에게는 어떤 방식으로 병역을 면제 받았는가, 혹은 어떻게 병역 특례를 얻었는가가 화제가 될지도 모른다.

병역, 어떻게 처리했어?

면제받았지.

난 특례야. 면제를 받았어야 하는데…….

모두가 그렇듯 나는 33개월간의 병영생활을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리곤 한다. 고통과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아련한 추억이 되는 것이다. 나는 비록 피할 수 없는 ‘독배’이긴 했지만 거기서 보낸 시간이 반드시 부정적이진 않았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다. 억지와 생떼가 상식과 논리를 압도하는 시간과 공간이었지만 군대는 젊은이들에게 사회를 선행 학습하게 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어버이들 가운데 자식을 군대에 보내고 싶어 하는 이가 얼마나 될까. 군대에 보냈다가 생때같은 아들을 잃은 어버이들은 또 좀 많은가. 합법적으로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나 보통의 부모들은 '건강하게 돌아오라'고 축원하면서 자식을 떠나 보낸다.
자식 사랑이 기득권들의 그것과 달라서가 아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국민에게 부여된 '의무'는 지켜져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아도 되는 부정한 방법을 찾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옳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이 이른바 사회지도층과 보통사람들이 갈리는 지점이다.


'면제' 가능한데도 기어코 군대에 가야겠다는 조카
벌써 2년 전 일이다. 8순의 조모를 모시고 사는 집안 조카가 있다. 그해 스무 살이 된 이 녀석은 태어나면서부터 콩팥이 하나뿐이다. 집안 형편도 어렵다. 집안 형편으로 치든, 신체 조건으로 치든 이 애는 면제감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녀석은 신검에서 1급 현역 판정을 받고 돌아왔다.

사전에 미리 진단서를 발급받아서 신검 때 제출하라고 일렀건만 녀석은 그 과정을 생략해 버렸다. 신검을 앞두고 친인척들은 녀석이 병역 면제를 받는 걸 전제로 장래 계획을 세울 것을 충고했다. 그런데 녀석이 반응이 좀 미지근했던 것 같았다.

네 어린 마음에는 군대에 다녀오는 게 좋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합법적으로 면제를 받을 수 있다면 받는 게 옳다.

너를 군대에 보내고 2년이 넘게 기다려야 할 할머니를 생각해야 한다.

네가 받는 병역 면제는 나라가 네 집안 형편을 헤아려 내리는 배려다.

네가 예뻐서가 아니라 너희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을 감안한 결정이란 말이다.

아들 녀석이 병무청 누리집에 들어가 확인해 보더니 당연히 '면제감'이라고 말했고, 우리도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애당초 아이는 면제를 받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진단서도 준비하지 않았고 집안 형편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모두가 재검을 받으라고 성화였지만 아이는 재심 신청도 하지 않았다. 선의가 무시당한 듯해 모두 언짢아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군대에 가서 병역 의무를 다하겠다는 녀석에게 철없다고 꾸짖기도 그렇고, 본인의 생각이 그렇다니 어떡하겠는가.
당시 화제가 된 총리 후보의 두 아들은 몸무게가 45Kg에 이르지 못한 탓에 20대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중년 질환 ‘통풍’으로 각각 병역을 면제 받았다 한다. 신체가 건강하지 못해 병역을 면제 받은 아들도 아비에겐 사랑스런 자식이리라. 그래서 나는 그래도 군대에 가겠다는 조카 녀석을 '숙맥'이라고, 미욱하다고 나무라기보다는 ‘건강한 국가관’을 가진 건실한 청년으로 여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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