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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그날 대한민국은 비로소 대한민국일 수 있었다

  • 입력 2015.04.20 12:29
  • 수정 2018.04.19 09:45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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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4.19 하면젊은 사자들로 기억한다.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총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늙은 독재자를 끌어내린 정경으로 4.19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4.19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오히려어린 사자들이다. 4.19를 가져온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은 시작이었을 뿐이다. 4.19에서 죽어간 186명의 선열 가운데 대학생은 22명이다. 그리고 고등학생은 36명이다. 대학생보다 더 많은 고등학생이 죽어갔다. 국민학생과 중학생을 합친 희생자도 19명이다. 초중고생의 희생자는 대학생을 압도한다.

3.15 부정선거 후 서울에서 최초로 일어난 시위 역시 고등학생들이 주도한다. 3 17일 성남고등학교 학생 4백명은 마산 사태의 발포 책임자 처벌, 부정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진출했다. 영등포 일대에서 치열한 시위를 벌이던 그들 가운데 100여 명이 잡혀 들어갔고대가리 피도 안 마른 놈들의 시위를 경찰은 처절한 몽둥이질로 응징한다.

이후 교장에게 애들 잘 관리하라고 타박을 했을 때 교장은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 “정의는 막을 길이 없다. 애들이 올바르게 행동했는데 무슨 지도를 하란 말인가.” 친일파로 이름 높은 장군 출신의 교장 김석원이었다. 친일파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망정 그 순간 김석원을 바라보며 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주먹을 다잡고 있었다.

피의 화요일 4 19일 첫 시위 역시 대학이 아니었다. 하루 전날 깡패들에게 공격 당해 피 철철 흘리며 돌아왔던 인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소식에 치를 떨던 대광고교생들은 오전 8 30분 경 시위를 시작한다.

우리는 제 2세 국민으로서 아래와 같은 결의를 선포한다. “어디까지나 오늘의 역사를 내일에 물려받을 주인공으로서, 붉은 핏발 지고 때묻은 역사를 계승 받기는 싫다. 그리고 315의 불법과 불의의 강제적 선거로 조작된 소위 지도자들은 한시 바삐 물러가야 한다. 형제들이여! 대한의 학도여! 일어나라! 피 묻은 국사를 보고 그냥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정의에 불타는 학도이거든, 진정한 일꾼이 되려거든 일어나라! 31 정신은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 조국은 어디까지나 민주 공화국이요, 결단코 독재국가, 경찰국가는 아니다. 법에서 이탈하고, 만행으로 탄압하는 정부를 보고만 있을 수 없어 대광학생들은 평화적인 행위로 시정을 요구하는 바이다.”

3학년이 선봉에 서고 1,2학년이 뒤를 따랐다. 종로 5가에서 경찰과 깡패들의 공격을 받고 혜화동에서 또 한 번 박살이 난다. 하지만 그들의 아우성은 당시 혜화동에 있던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을 격동시켰다. “형님들 뭐하십니까?” 악을 쓰며 끌려가는 동생들의 울부짖음은 상아탑에 갇혀 있던 대학생들의 가슴에 천불을 질렀다. 안 그래도 시위를 준비하고 있던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명문(名文)이라 할 선언문을 발표하며 거리로 나선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지금의 두타빌딩 자리에 있었던 덕수상고 학생들도 시위에 나섰다. 이 학교에서는 두 명이 희생되는데 그 중의 한 명이었던 김재준은 종로 4가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하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붕대로 상처를 싸맨 후 소방차에 매달려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의 조준 사격에 의해 심장이 꿰뚫리고 만다. 동성고등학교는 거의 모든 전교생이 시위에 나서고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교장과 교사들이 그 주위를 지켰다.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였던 경기고등학교에서는 무려 4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민주화운동사업회 자료 중) 당시 동북중학교 2학년이었던 강예섭은 그날의 정황을 이렇게 시로 썼다.

“어른들은 눈에 눈물이 글썽하여 / “우리가 지은 죄로 저 애들이 피를 흘린다 / 길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이들 가운데 유서(?)를 남긴 사람은 한 명. 진영숙이라는 열 다섯 여중생이었다. (이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으나 그것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그 마음은 같았을 것이다) 그녀는 데모대가 탄 버스에 올라타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구호를 외치다가 머리에 총을 맞았다.



故진영숙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끝까지 부정 선거 데모로 싸우겠습니다.
지금 저와 저의 모든 친구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니,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잘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가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닌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 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 있습니다.
너무도 조급하여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 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습니다.

그때 대한민국은 지지리도 못사는 나라였다. 그 해 독립한 아프리카 나라들보다도 못살았고 북한은 라이벌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대동강의 기적을 이루며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그러나 1960 4 19일로 인해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으로서의 자긍심을 획득한다. 이승만이 했다는 말처럼불의를 보고서도 일어서지 않는 국민은 죽은 국민” (영감탱이 말은 잘한다)일진대 힘 앞에서 공손하지만은 않고 불의 앞에서 눈 내리깔지만은 않는,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아는 사람들임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북한이수령님이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로 수십 년 세월을 보내는 동안 남한 사람들은 차례 차례 등장하는 독재자들에게 기가 죽는 듯 보이다가도 기어코 일어나 그들을 끌어내리고 혼쭐을 냈다. 그 에너지의 차이가 결국 오늘날의 남북을 낳았을지도 모른다. 그 시작이 4.19였다.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는 이것이 아니었다!”고 들고 일어선 고교생들의 힘,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하고 편지를 썼던 여중생의 강단, 총에 맞아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붕대를 감은 채 죽음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던 고교생의 뜨거운 의기, 그것들을 잊거나 잃으면 우리의 미래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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