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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학살사건의 증인들

  • 입력 2016.09.15 15:55
  • 수정 2016.12.03 16:55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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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말, 수원 지역 만세 운동의 기세를 다시 달아오르게 한 사건이 있었다. 3월 29일 수원 경찰서 앞에서 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 남짓의 기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기가 찬 일본 경찰이 앳된 여자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이를 지켜본 수원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경찰들과 투석전을 벌이고 일본인들의 거주지를 습격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는 시위군중. 출처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이후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에서는 3월 30일과 4월 5일 격렬한 만세 운동이 벌어졌고, 일본 경찰은 격렬한 매질로 이에 대응했다. 일본 당국은 수원 지역 만세 운동을 맞닥뜨리면서 한 번 '본때'를 보여 줄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불운한 타겟이 된 게 제암리라는 마을이었다.
일본군 수원 주둔 78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이끄는 부대가 제암리에 도착했다. 아리타 중위는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마을에 보내, “만세운동을 진압하며 너무 심한 매질을 한 것을 사과하려고 왔다.”라고 말하며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들을 호출했다. 오지 않은 사람을 직접 찾아가서 불러 왔을 정도니 계획적인 성격은 다분했다.
아리타 중위는 교회 안에 모여든 주민들과 몇 마디 나눈 후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문을 봉쇄한 뒤 사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 사격을 개시했다. 학살 와중에 한 여인이 아이만은 살려 달라고 창 밖으로 아이를 내밀었지만 일본군들은 사정을 돌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찔러 죽였다. 또 증거인멸을 위해 교회의 초가 지붕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지른 뒤 인근 마을에서도 살인극을 펼쳤다. 이 날 교회와 그 부근 마을에서 죽어간 사람은 모두 29명.


불타버린 제암리 마을. 출처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이 말문이 막히는 야차들의 행동을 숨죽여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전동례라는 여성이었다. 그 남편 안진순은 열흘 전의 시위에 동참했다가 흥건히 얻어맞고 몸져누워 있었는데 느닷없이 들이닥친 일본군들에게 교회로 끌려가서 죽었다. 마을로 들이닥친 일본군의 행동을 전동례는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 옆집에 강태성 씨 부인 김순이 씨가 남편이 끌려갔다고 우니까 일본군이 칼을 빼 들고 머리를 내리쳤어. 첫 칼에 안 죽으니 세 번을 내리쳤고 머리가 떨어졌어."

전동례는 밭고랑에 숨어서 몇 시간 전만 해도 정답게 수다를 떨던 이웃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부들부들 떨면서 지켜 보아야 했다. 시체가 타들어가던 냄새, 비명 소리, 일본군의 기합 소리는 아흔 여섯으로 세상을 등질 때까지 그녀를 괴롭혔다. "낮 12시가 넘어가고 2시만 되면 마음이 두근거려." 아직 거동이 가능했을 때 그녀는 어김없이 2시만 되면 교회에 나가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힘 있고 잘사는 나라가 되어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암리 학살사건 당시 남편을 잃은 한 여인. 출처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이 학살극의 총 지휘자 아리타 중위에 대한 군법회의 기록은 2006년이 되어서야 공개됐다. 일본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이 기록을 찾아낸 이는 5공 시절 전두환의 충직한 심복으로서 '한국의 괴벨스'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이원홍 전 문공부 장관이다. 그 무엇도 약에 쓸 데가 있다는 속담은 때론 절묘하게 맞는다.
판결문 기록은 대체로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아리타 중위가 한 짓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적시하고 있으면서도 판결문은 생판 어이없는 결론에 이른다.

"범죄자를 처벌하려면 그에게 죄를 범하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하는데, 피고의 행위는 훈시명령을 ‘오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피고는 범의가 없다고 봐야 한다. 또 과실범을 처벌하는 특별한 규정도 없으므로 피고에게 무죄를 언도한다."

이 판결문에 땡전뉴스 시절 KBS 사장으로서 별 억지를 다 부려 보았을 이원홍 씨도 흥분하기에이른다.

“아리타는 당시 부녀자 2명을 직접 일본도로 목을 쳐 살해한 자이며 이 무죄 논리는 세계 재판사상 유례없이 해괴망칙한 광언이다."

범행을 저질렀으되 범행의도가 없었으니 무죄라는, 실소가 나올 만큼의 뻔뻔스러운 판결이었다. 이 어이없는 판결에 스스로 창피했는지 판결문 뒤에 반드시 등장해야 할 재판관들의 이름은 누락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원홍에 앞서서, 그리고 전동례 할머니보다 먼저 부릅뜬 눈으로 참혹한 현장을 답사하고 그를 세계에 알린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세균학자로 와 있던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였다.
3.1 운동의 숨겨진 조력자로서 식민지 조선의 아픔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던 그는 풍문으로 전해진 제암리 소식을 듣고 서울역으로 달려간다. 수원역에서 멀리 떨어진 현장에 가기 위해 자전거까지 짊어진 채였다. 제암리 현장에 도착한 스코필드 박사는 ‘분노로 부들부들 손을 떨면서’ 카메라 셔터를 눌렀고 이 사진은 1919년 4월 15일의 제암리를 역사 속의 실재로 남기게 된다. 예배당 안에 숯덩이가 되어 뒹굴던 21구의 시신과 불에 타다 남은 두 구의 시신을 수습하여 공동 묘지에 매장한 것도 그였다.


일제군경에 의해 학살된 한국인들에 대한 장례식. 출처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그의 활약으로 일본의 만행은 세계에 공포되었고, 일본 식민 통치의 잔인함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그 천인공노의 참상 앞에서 어떤 일본인 목사는 이렇게 부르짖었다.

소름 끼치고 떨리니
죽은 시체는 타지도 않네
그것뿐 아니라, 한적한 마을의 집도 불태우고
타고 또 타고 40여 채 부락은
일순간 잿더미로 변해
어떤 이는 잿더미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아직 연기가 코 밑에도 오지 않았듯
젖꼭지를 물린 채 애를 안고 있는 어머니
도망가다 넘어진 늙은 할멈들
검게 타버린 시체는 본체만체... 이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 또 있을 텐가
저주받지 않을까
동해 건너 군자의 나라여

- 사이토 이사무, 「어떤 살육사건」

1919년 4월 15일. 복사꽃피고 진달래 타오르던 봄날 제암리에서는 수십 명의 생목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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