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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 김주열과 독재부역자 이은상

  • 입력 2015.04.11 18:23
  • 수정 2015.04.11 18:25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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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이 주먹 부르쥔 모습으로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으로 떠오른 것이 1960년 4월 11일이었다. 이름 모를 낚시꾼은 역사를 건져 올렸다. 그 모습을 최초로 카메라에 담은 것은 부산일보 마산 주재 기자 허 종이었다.

"쉬고 있는데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이 다가 오더니 '중앙부두 앞에 시체가 떠올랐는데 틀림없이 김주열이다'라고 하더군요. 그 길로 바로 달려 나갔죠. 부두 암벽에서 불과 3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 자세가 마치 복싱(Boxing)하는 폼이었어요. 물결에 일렁이며 수면 위로 들락날락하는데, 가만히 보니 왼쪽 눈에 쇠뭉치가 박혀있더군요."

그 몇 년 뒤 정부에 의해 강탈당해 '정수장학회'의 소유가 될 운명이었던 신문 부산일보는 이 사진을 사회면 톱으로 실었다. 그래도 분기를 참을 수 없었던지 논설위원 김태홍은 사진 옆에 ‘마산은!’이라는 제목의 시를 휘갈겨 썼다. 그 일부다.


마산은

고요한 합포만 나의 고향
봄비에 눈물이 말없이 어둠속에 피면
눈동자에 탄환이 박힌 소년의 시체가
대낮에 표류하는 부두
정치는 응시하라 세계는
이곳 이 소년의 표정을 읽어라
이방인이 아닌 소년의 못다한 염원들을
생각해 보라고

AP 통신을 통해 이 사진이 전 세계로 타전되는 소리는 곧 이승만 정권의 조종 소리와 같았다. 시신을 본 마산 시민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3.15 선거 당시 외쳤던 구호들, "내 표를 돌려다오.",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김주열을 살려내라는 절규와 아울러 이승만 정권에 대한 격렬한 혐오를 드러내는 직설적인 외침으로 바뀌었다.

당시 경남지사는 조사차 내려온 국회의원들에게 이렇게 강변하고 있었다.

"투석을 하고 관공서 때려부수고 죽여라, 부숴라를 외치는 것으로 보아 공산당의 사주 같다.”

사건 발생 한 달 전인 3월 15일 마산 사태 때 총 맞고 실려온 이들의 주머니에 삐라를 몰래 집어 넣고, 의사들에게 불온삐라가 나왔다고 말하라고 윽박지르던 그 수법은 변함이 없었다. 전라도 남원에서 마산까지 유학 왔다가 데모 와중에 비참하게 죽어간 학생 눈알에 박힌 최루탄 위에서 그들은 ‘좌익’과 ‘불순분자’를 논하고 있었다.
4월 14일 김주열의 시신은 몰래 빼돌려져 전북 남원의 고향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유족 동의도 없이 불태워 버리고 식구들에게 뼛가루만 안겨줬던 박정희 정권 때보다는 나았지만 청천벽력은 매일반이었다. 시신 인도 확인서 작성을 요구하는 경찰에게 김주열의 어머니는 이렇게 부르짖는다.

"나는 못 받겠으니 이기붕에게나 갖다 주시오!"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은 이제 불행하게 꺾여 버린 젊은 꽃에서 3천만 국민의 가슴팍에 꽂히는 불화살로 삼천리 방방곡곡을 가로질렀다. 하나 기억할 것. 김주열의 시신으로 촉발된 2차 마산 시위 때까지도 서울은 조용했다. 마산에서 난리가 났지만 3.15로부터 그때까지 서울의 대학생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최초의 대학생 시위는 전북대생들이었고, 서울의 대학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침묵을 지켜오고 있었다. 하지만 김주열은 그 침묵을 지탱하던 기둥뿌리를 뽑아버렸다. 이럴 수는 없다!
그런데 같은 마산 사람이라도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노산 이은상이었다. 눈뜨고 볼 수 없는 부정선거 준비가 자행되던 3월 초, 자유당 유세에 등장하여 '성웅 이순신 같은 분이라야 나라를 구할 것인데 그 같은 분은 오직 이 대통령이시다!’라고 열변을 토하여 듣는 이를 어리벙벙하게 만들었던 이 재주 많은 시인은 4월 15일 조선일보에 마산 시위를 규탄하는 글을 발표한다.

군사독재에 부역했던 문인 이은상

제 자식같은 학도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고기들 끼니가 되어 있다가 물 밖으로 나온 것을 보고도, 저 위의 김태홍이 쓴 마산은!을 보고도 그는 이렇게 서두를 뗀다.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다! 불합리와 불법이 빚어낸 불상사다."

그의 판단에 따르면 김주열은 지성을 잃고 불합리의 선봉에서 불법의 투구를 쓰고 싸우다가 정당한 공권력에 죽어간 이였다. 그가 지은 노래처럼 마산 바다를 시신 썩는 냄새로 오염시킨 데모꾼일 뿐이었다.

"내가 마산 사람이기 때문에 고향의 일을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다. 분개한 생각이야 더 말할 것이 있으랴마는 무모한 흥분으로 일이 바로 잡히지는 않는 법이다. 좀 더 자중하기를 바란다. 정당한 방법에 의하지 않으면 도리어 과오를 범하기가 쉽다."

나흘 뒤 4.19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은상은 4.19에 죽어간 영령들에게는 또 이런 글을 쓴다.

"이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 명 학생 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윌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 피어나리라."

참 명문이다. 기가 막힌 명문이다. 그리고 단 며칠 사이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는가에 있어서도 그 기는 여전히 막힌다. 그 1년 뒤 5.16이 나고 선글라스 쓴 작달막한 장군이 전역하여 공화당을 창당하자 그는 그 명문으로 또 공화당 창당 선언문을 쓴다. ‘잘 살아보세’를 부르짖는 박정희 시대 그가 쓴 시는 너무나 절창이라 또 한 번 가슴을 울린다.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그는 박정희가 죽은 후 ‘하늘이 무너진 듯 강물이 갈라진 듯..’으로 시작하는 추모가를 썼고 전두환이 들어선 뒤에는 국정자문위원으로 탈바꿈한 뒤 편안하게 세상을 떴다.
오늘날 마산에는 김주열을 기념하는 행사나 기념물보다는 이은상을 기리는 그것들이 열 배는 더 많다. 동네 지명으로 노산동이 있고 가고파 국화 축제가 있으며 노산 공원과 기념비도 건재하다. 하지만 김주열에 대한 기억은 안쓰러울 정도로 희미했다. 심지어 시가 발행하는 마산시보에서 "저녁 먹다가 데모 구경 나갔다가 변을 당했다."는 식으로 김주열을 서술하여 한바탕 소동이 인 적이 있을 정도였다.

노산동이 있고 노산공원이 있는 마산에서 2002년과 2003년 시민단체가 '김주열로'를 만들자고 청원했을 때 마산 시는 '특정 인물 부각'을 이유로 각하시킨 바 있었다. 2010년 4월 11일 김주열이 마산 앞바다 그 푸른 물에 떠오른 그 50주년 되는 날, 김주열을 위한 범국민장이 뒤늦게 마련되어 그 혼을 달래고 김두관 전 지사가 '민주 성지'로 조성하겠다는 말을 한 것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정도다.
돌아가서 이은상은 글을 참 잘 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참 옳은 말을 많이 했다. "나라 젊은이들의 혈관 속에 정의를 위해서는 생명을 능히 던질 수 있는 피의 전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역사는 증언한다." 얼마나 지당한 말씀인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인 이유는 일어날 때 일어나고 싸울 때 싸울 줄 알았던 젊은이들과 시민들의 의기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은상이 그 문재로 권력을 섬길 때조차도 그 '전통'은 숙여지지 않았고 국민들은 몸이 부서지도록 싸웠다. 유신을 몰아냈고, 전두환을 가뒀고, 촛불의 바다를 이뤘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 왔다. 오늘날도 그러하기를 기대한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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