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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의 총성, 허원근 일병의 의문사

  • 입력 2015.04.02 14:33
  • 수정 2015.04.02 14:35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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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치명상

1984년 4월 2일 새벽 강원도 화천의 군 부대에서 총성이 울렸다. 국방부는 허원근 일병이 “누나 학비를 마련하지 못한 채 휴학 후 입대한 것을 비관하던 중 상급자의 가혹행위와 질책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첫 번째 이상한 점, 허원근 일병에게는 누나가 없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착각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방부의 발표를 믿기에는 너무나 불가사의한 점이 계속적으로 드러났다.

허원근 일병 죽음 당시 상황 재연 - '그것이 알고싶다' 중에서

왼쪽 가슴에 총구를 대고 M16을 쏘았으나 뜻대로 죽지 않자 오른쪽 가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고 그래도 숨이 끊어지지 않아 자신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돌려 최종적으로 자살에 성공했다는 것이 국방부의 발표였다. 이에 따르면 허원근 일병은 X 파일에 등장하는 외계인 아니면 킹콩에 해당하는 생명체이지, 붉은 피와 여린 살을 가진 인간일 수 없었다. 그러나 죽어도 국방부는 허원근 일병은 그 방식으로 목숨을 끊었다고 우겼다. 외계인을 자식으로 둔 바 없는 아버지는 당연히 그에 의문을 제기했고 대한민국 국방부와 자식 잃은 아버지와의 기나긴 진실 게임은 무려 26년의 세월을 잡아먹게 된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가족들은 아들의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한다. 국회에 청원서를 내고, 행정기관에 탄원서도 제출했지만 상대는 “태산도 조약돌로 만들 수 있고, 조약돌도 태산을 만들 수 있는” 군대였다. 가족들의 목소리나마 진지하게 들어주고 그 의문에 대답한 국가 기관은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처음이었다. 사건 발생 18년 만이었다.

의문사위원회는 이 사건을 조사한 뒤 “M16 소총을 반자동 위치에 놓고 오른쪽 가슴과 왼쪽 가슴 그리고 머리에 한발씩 맞았는데 이를 두고 자살로 판단한 군의 조사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대통령 직속 의문사위원회가 “당신들 못 믿겠다.”고 선언한 이상 국방부도 어떻게든 움직여야 했다. ‘국방부 특별 조사단’이 구성되어 사건 재조사에 나섰다. 노무현 정권 치하의 국방부 특별 조사단은 전두환 치하의 군대 헌병대와 똑같은 결론을 낸다. 역시 허원근은 킹콩이라는 것이었다. “중대장의 가혹행위에 견디다 못해 M16 3발을 왼쪽 가슴과 오른쪽 가슴과 머리에 쏘고 죽었다.”는 것이었다.

계속된 협박

2004년 2기 의문사위원회의 재조사가 시작됐을 때, 놀라운 일들이 연달아 벌어진다. 국방부 특별조사단장으로서 허원근은 킹콩이었다는 투의 발표를 되풀이 암송했던 정모 장군은 의문사위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1기 의문사위원회같은 우를 범하지 말라. 조사 결과를 나한테 먼저 알리지 않고 언론에 발표하면 당신들 다 죽어!”

한바탕 난리가 나고 의문사위원회가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하자 대한민국 육군 장성은 자신은 그런 말 한 적이 없으며 ‘경상도 톤’ 때문에 오해를 빚었을 수 있다는 군인답지 않은 변명으로 일관한다. 전두환이나 노태우 시대의 일이 아니라 자그마치 ‘참여 정부’때 일어난 일이었다. 이후로도 정모 장군은 아무 탈 없이 승진하여 1군 사령관을 거쳐 국회의원도 됐다.



2기 의문사위원회의 조사 과정도 가시밭길이었다. 군 당국의 무성의는 이미 말할 계제도 못되고, 심지어 총을 쏘면서 조사단원들을 위협하는 일까지 있었다. 국방부는 “불법 조사에 대한 자구책”이라고 강변했다. 국군을 공비로 가장시켜 사건 조사차 찾아온 국회의원들에게 총격을 가한 1공화국 때 이야기가 아니다. 6공화국 하고도 참여정부 시절에 이런 황망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당연하게도 조사 결과는 달랐다. 2기 의문사 위원회 역시 자살이 아님을 주장하고 용의자까지 제시한다. 한 사건을 두고 두 국가 기관이 외나무 다리 위의 양처럼 뿔을 세운 이상 진실은 법정에서 가려질 수 밖에 없었다.

뒤집힌 판결

마침내 2010년 2월 법원은 1심 판결을 통해 허 일병이 타살되었음을 인정하고 국가로 하여금 그 부모에게 배상할 것을 명령한다. 판결문은 국방부가 얼마나 치사했고 용렬하였는지를 적시하고 있다.

"사고 당일 허 일병은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으나 당시 대대장과 보안사 간부 등은 자살로 위장하기로 의견을 모은 뒤 구체적 지시를 내렸고, 부대원은 물청소로 사망 흔적을 지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헌병대는 사전에 요구한 대로 진술하라고 중대원에게 가혹행위를 하는 등 조작 및 은폐에 가담한 것으로 보인다"

허지만 이 판결은 고등법원에서 뒤집힌다. 고등법원은 군의 부실 수사 책임을 인정하고 그로 인해 이런 사단이 났다고 하면서도 허원근 일병은 자살했다고 판결했다. 결국 대법원으로 갔고 아직 최종 판결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그리고 올해로 허원근 일병이 간 지는 31년째가 된다.

양쪽 가슴과 머리에 구멍이 나서 돌아온 아들이 '자살'했다고 눈 하나 깜짝 않고 우겨 온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 앞에서 그 아버지의 심경은 어떠하였을까? 제대한 지 한참이 지나 이제는 그 원혼을 풀어 주고 싶은 마음으로 자신이 아는 진실의 조각들을 제시하려던 이들에게 군대의 명예 운운하며 압박을 가하는 군바리들은 어떻게 비쳐졌을까.

군대를 갔다 온 이들은 군의 ‘명예’를 위해서 진실이나 인권 따위가 어떻게 소모되었는지를 잘 안다. 명예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세워가는 것이며, 명예가 두려워할 것은 불명예가 그 자체가 아니라 허위와 기만임을 대한민국 군대는 오래도록 잊어 왔다. 천안함 사태나 그 외 군내에서 불거진 사태에 대한 끝없는 불신 앞에서 왜 우리를 믿어 주지 않느냐면서 가슴을 치는 군인들이 안쓰럽기는 하지만 그것은 수십 년 동안 군이 이룩한 자업자득이었음을 알아야 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 27년 전 세 발의 총탄을 양쪽 가슴과 머리에 맞고 죽어간 한 청년의 '자살'은 그 허다한 '업'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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