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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했던, 그리고 뜨거웠던 여류화가 나혜석

  • 입력 2016.09.09 10:39
  • 수정 2016.12.03 16:56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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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3월 19일. 한 화가의 개인전이 열렸어. 화가라는 이름을 달고 개인전을 여는 일 자체가 그다지 흔하지 않았을 시절이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가일층 쏠린 데는 이유가 있었어. 매일신보 표현대로라면 “여성 서양화가로 우리 조선에 유일무이한 나혜석씨의 양화 전람회”였던 것이지. 이틀간의 전시회에 수천 명의 사람이 몰릴 만큼 전람회는 대성황이었어. 수천 명의 관객을 동원한 화가 나혜석은 전도유망한 변호사 김우영의 아내였지. 조선에서 가장 행복하고 완벽한 부부로 보였다마다. 그녀가 그로부터 28년 뒤 길거리에서 행려병자로 목숨을 다할 줄이야 당시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말이지.



그녀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뭔가 이성의 눈길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었고 몸을 타고 흘렀던 여자였던 것 같아. 또한 그녀 자신도 누군가의 매력에 끌리기를 잘하는, 일종의 불같은 여자였다고나 할까. 일본 유학 시절 그녀를 연모한 일본 청년의 호소는 콧날이 시큰할 정도지

“당신에게 일본 사람으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조선 사람이 되어 살겠습니다.”

참 절절한 고백이었지만 3.1운동에 참여한 것은 물론이고 후일에도 여러 번 독립운동가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했던 반골에 불령선인(말 안듣는 조선인)끼 다분했던 나혜석은 그 호소를 받아들이지 않아.

얼마 전 얘기했던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작가 염상섭을 비롯해서 많은 남자들의 가슴을 휘저은 그녀이지만 그녀에게는 따로 깊은 사랑이 있었어. 최승구라는 유학생이자 시인이었지. 이광수와 쌍벽을 이룰 정도였다니 나혜석이 빠져들만도 했겠지. 나혜석의 오빠 나경석은 최승구가 결핵 환자이며 결정적으로 고향에 아내를 두고 왔다는 사실 때문에 반대했지만 나혜석은 마이동풍. 하지만 반대는 양가 모두 마찬가지였어. 최승구의 숙부는 “첩이라면 몰라도 결혼은 안돼.”라고 단언했으니까.

이런 수선 와중에 최승구는 결핵이 심해져서 세상을 뜬다. 나혜석은 이 죽음으로 휘청거린다. “그는 나를 버리고 갔다. 그가 나에게 모든 풍파를 안겨 주고 멀리멀리 간 날이 이 봄밤이다.”라고 훗날 쓰고 있는데 소설가 염상섭이 그 후 그녀에게 닥친 불행이 이 죽음에서 비롯됐다고 할 만큼 그 상처는 컸나 봐.
이후 나혜석은 춘원 이광수와도 썸싱이 있게 되는데 이 이광수가 민족에게나 여자에게나 지조가 없어서 나혜석과 의사 허영숙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네. 결국 이광수가 허영숙에게로 귀결된 이후에야 그녀는 그를 묵묵히 지켜봐 온 한 남자에게 주목하게 되지. 그가 변호사 김우영이야. 그는 그녀의 과거를 다 알았고 용인했어. 뭐 자기도 애 딸린 홀아비 처지에 용인 안 한들 어쩔 거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김우영은 나혜석을 어지간히 사랑했다고 봐야겠지?

그런데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매우 맹랑한 조건을 내걸어. 첫째 평생 나만을 사랑해 달라. 그림 그리는 거 방해하지 말고,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 같이 살게 하지 말아달라. 마지막 요구는 정말로 맹랑한 거였어.

"죽은 전 애인 최승구의 묘에 묘비를 세워 달라."

아니 장인어른 묘도 아니고 옛 애인 묘에 묘비를 세워 달라는 이런 파격적인 여자가 있나. 아직 불꽃이 사그라들지 않은 거지. 나를 쥐려면 이 정도 뜨거움은 감수하라는 듯 발갛게 달궈져 있었던 게지. 제 몸이 타든 말든 일단 빛을 발하고 보는, 그 빛이 또 남의 눈을 멀게 만드는 그런 여자였던 거야. 하지만 김우영은 고개를 끄덕인다. 거듭 거듭 어지간히 좋아하긴 좋아했나봐. 신혼여행 장소가 최승구의 고향 고흥이었다면 더 할 말이 없지. 그 후 김우영이 어떻게 변신했든 관계없이 김우영은 나혜석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거야.

그렇게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주렁주렁 낳고 일본 외교관으로 변신한 남편의 곁에서 그녀는 꽤 행복해 보이는 시간을 보내. 시인 최승구가 그녀의 불을 품고 사라진 나무 같은 남자였다면 김우영은 그녀라는 불덩이를 감싸는 흙 같은 남자였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흙가마가 되어 그 안에서 도자기를 구워 내며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당시 일본 외무성은 오지(?)에서 고생한 외교관들에게 보상 차원에서 해외연수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는데 김우영 부부는 그 특혜의 대상이 돼. 그래서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유럽으로 가서 꿈 같은 유람을 하게 되는데 이 부부에게, 특히 김우영에게 악몽 같은 일이 발생한다.


나혜석의 자화상(1928)



파리에 체류하고 있던 최린이라는 사람을 만나는 거지. 남편은 독일로 법 공부를 가고 나혜석은 파리에 남아 미술 공부를 하기로 했는데 김우영은 친분이 있던 최린에게 아내를 돌봐 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하는군. 김우영도 나혜석의 10년 연상이었는데 최린은 김우영의 큰형님뻘이었으니 김우영은 거의 삼촌에게 조카며느리를 건사해 달라 부탁하는 기분이었을 거야. 하지만 그의 선택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요 사기꾼에게 통장과 비밀번호를 준 것과도 같았지. 학식에 예술적 안목에 중년의 중후함에 등등등에 나혜석은 최린과 사랑에 빠져 버렸지. 아주 영화를 찍어요.

“선생님을 사랑하지만 남편과 헤어질 수는 없어요.” 최린도 죽이 맞아. “당신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이오. 나도 거기에 만족하오,” 나혜석은 한 80년 뒤의 드라마에 나와도 방송통신심의위원들이 거품을 물 얘기를 서슴지 않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결혼한 후에 다른 남자나 여자와 좋아 지내면 부도덕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자기 남편과 더 잘 지낼수있게 하는 활력을 얻는다.” 할렐루야.

SBS드라마 '아내의 유혹' 중 한 장면

나혜석이야 원래 불이라고 치고 최린도 불인 줄 알았는데 최린은 불이 아니라 물이었어. 뜨겁게 펄펄 끓을 때는 불보다 더 뜨거운 줄 알았는데 팍팍 식어버리는 물이었어. 그리고 심지어 냉기까지 서리지. 사실 유럽에서의 이 염문은 대충 마무리가 됐다고 해. 그런데 문제는 나혜석이, 이 뜨거운 불덩이가 최린에게 계속 사귀자는 식으로 했던 데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이미 최린은 식어버린 물이었거든.

자기가 식었으면 적당히 외면하면 됐을 것을 이미 북대서양 빙산 바닷물처럼 냉랭하게 변해 버린 최린은 김우영에게 사람을 보낸다.

“마누라 단속 좀 잘 해.”
김우영도 나혜석에게만 충실한 순정남은 아니었어. 다른 여자가 있었다고도 해. 하지만 그는 최린의 충고(?) 이후 '돌아' 버린다. 그리고 이 가마 같던 남자는 불의 숨을 막아버리는 흙더미가 돼 버리지. 이혼을 하고 쫓아내다시피 한 후 자식들과의 인연을 끊어 버린 거야.. 하지만 나혜석의 화기(火氣)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는다. 유명한 그녀의 이혼고백장을 보자.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 사람쯤 하더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이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닙니까.” 여기서 그녀는 한 발 더 나간다. “ 배우자를 잊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혼외 정사를 벌이는 것은 죄도 실수도 아닌 가장 진보된 사람의 행동일 뿐이오.”


21세기 대한민국 남자가 들어도 펄펄 뛸 얘기를 일제 시대에 해 버리는 이 용접기 불길 같은 여자.

그는 남편에게는 위자료를 청구하지 않지만 최린에게는 위자료를 청구한다. 즉 결국 자신을 유혹할 때에는 온갖 감언이설을 서슴지 않더니 막상 일이 터지니 입을 씻더라는 거지. 위자료 청구 이유는 또 나혜석과는 매우 어울리지 않는 이유, “정조유린.”

모르긴 해도 나혜석은 역시 불이었던 것 같아. 불은 불쏘시개 없이는 타오르지 못하지. 나혜석은 조선 천지에서 가장 독립적인 여자였지만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 집착하거나 매달리거나 안되면 복수라도 하려던 뜻밖에도 비주체적인 여자의 화염의 화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뒤 그녀의 운명은 비참 일로였어. 요즘 저런 여자가 있다고 해도 미친 여자부터 요부까지 별의 별 말을 들을 거 같은데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야 오죽했으려고. 그녀는 바닥에서부터 무너진다. 그녀의 그림이 출품되면 언론부터 디스했어. “불순한 작가에게 상을 주지 말라.” 는 식으로. 그녀는 외톨이가 돼 갔다. 그녀를 보물처럼 아끼던 오빠도 그녀가 자신의 집에 오는 것조차 싫어했다고 해.

한때 자기 젖을 빨리는 고통을 호소하면서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라 강요되는 것이라 주장하던 그녀는 아이들을 한 번이라도 보고 싶어 자식들 곁을 맴도는 늙은 어머니가 됐다가 중풍과 파킨슨 병이 겹친 중증 환자로서 어느 날 길에 쓰러져 그 뜨거웠던 인생의 불씨를 거둔다.

사람들은 참 다양하다. 누군가는 목숨을 거는 일에 누군가는 시큰둥하고 누군가를 녹여 버릴 열기가 누군가에게는 구들장의 온기에 다름 아니며 누군가는 인생을 망칠 만큼 자신을 던지면서도 자신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흐뭇해하는 반면 그 1/10도 발을 디디지 못하고 자신의 안온함에 만족하면서도 그 안온함에 지루해하기도 한다.



나혜석은 그 다양의 극단에 서 있었지. 볼링으로 치면 기왕 치는 거 멋지게 힘차게 공을 던지고 싶어했던 듯. 똥창에 빠지거나 스트라이크거나 그건 나중 문제. 몇 개를 쓰러뜨릴까 스페어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인생은 아니었지.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운명이 어찌될지 모릅니다. 속 마디를 지은 운명이 있습니다. 끊을 수 없는 운명의 철쇄이외다. 그러나 너무 비참한 운명은 왕왕 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반역케 합니다. 나는 거의 재기할 기분이 없을 만치 때리고 욕하고 저주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필경은 같은 운명의 줄에 얽히어 없어질지라도 필사의 쟁투에 끌리고 애태우고 괴로워하면서 재기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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