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대통령의 기만 ‘중동 가라’

  • 입력 2015.03.25 17:31
  • 수정 2015.03.25 18:21
  • 기자명 오주르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떤 죄가 가장 무거울까? 14세기 시인 단테는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목들을 ‘기독교 철학과 윤리’라는 저울에 올려놓고 각기 그 무게를 달아 가벼운 것부터 가장 무거운 것까지 순서대로 나열했다. 그의 서사시 ‘신곡’의 ‘지옥편’은 이렇게 구성돼 있다.



죄의 무게 달아 순차적으로 나열한 단테

단테는 죄의 경중에 따라 지옥을 9개의 원으로 구분했다. 가장 경미한 죄는 제1원에 속하고 가장 무거운 죄는 제9원)에 속한다. ‘저승의 강’인 아케론을 건너면 제1원인 ‘림보’가 나온다. 신앙은 없지만 심성이 착한 이들이 있는 곳으로 비록 지옥일지언정 고통과 괴로움은 없다. 단지 하나님을 믿을 수도 볼 수도 없을 뿐이다.

제2원은 색욕의 죄를 범한 자들이, 제3원은 폭음과 폭식에 빠졌던 이들이 고통 받는 곳이며, 제4원과 제5원은 탐욕과 분노의 죄를, 제6원은 이단자들이 뜨거운 관속에서 신음하는 곳이다. 제7원은 타인에게 폭력을 가했거나 자신에게 폭력(자살)을 행한 이들과 신과 자연의 순리에 폐해를 끼친 자들이 벌을 받는 공간이다. 제8원은 사기와 기만의 죄를, 지옥의 심연인 제9원은 배신과 반역의 죄를 범한 이들이 악마의 왕 루시퍼에게 붙들려 있는 곳이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 / 보티첼리>


9개의 원이지만 크게 나누면 ①부절제의 죄(색욕, 낭비, 탐욕, 분노) ②타인, 자신, 신에게 가한 폭력의 죄 ③사기와 기만의 죄 ④반역과 배신의 죄 등 4개로 요약된다. 단테는 부절제보다는 폭력이, 폭력보다는 기만이, 기만보다는 배신이 더 큰 잘못이라고 말한다. 물리적 피해(부절제와 폭력 등)보다 정신적 고통(기만과 배신)을 주는 것이 더 큰 죄라는 얘기다.



박근혜의 “중동으로 가라”, 황우여의 ‘미혼 현황판’

이쯤에서 청년 중동 진출을 독려한 박 대통령의 발언과, 자신의 집무실에 ‘처녀총각 현황판’을 붙여놓고 직원들에게 결혼을 압박한 황우여 교육부장관의 처사를 생각해 보자.

박 대통령은 중동 4개국 순방 성과를 자평하면서 “청년들이 해외에서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며 “대한민국의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라”고 중동진출을 강하게 독려한 바 있다. 황우여 교육부장관은 자신의 집무실 벽에 직급별 미혼 실태를 실적표처럼 표시한 ‘현황판’을 붙여놓았다. “미혼자 많은 과의 과장은 국장 못 되게 하겠다”는 황당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농담이라도 도가 지나치다. 취업을 못해 전전긍긍하는 청년들에게 ‘중동이나 가라’는 말은 마음의 상처로 남을 수 있다. 중동 진출이 이뤄진다면 박 대통령에게는 정치적 ‘호재’가 된다. 청년실업의 돌파구를 찾아낸 ‘치적’으로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년들에게는 중동행이 달갑지만 않을 것이다. 국내에서 취업하는 친구들이 있는데도 가족을 떠나 먼 이국에서 직장을 다녀야 한다는 것은 상대적 박탈감과 자괴감을 안겨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중동국가가 한국청년들에게 얼마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40년 전 중동붐이 일었던 그때와 현재 상황은 크게 다르다. 1970년대는 중동국가들의 ‘석유권력’과 ‘오일머니’가 절정에 달했을 시기여서 굵직한 건설 인프라 수주가 넘쳐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투자를 줄이고 긴축재정을 펴는 실정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비건설 분야에서 일정 수준의 경협이 이뤄진다 해도 제2의 중동붐은 언감생심이다.





본질을 호도하는 기만극

교육부 직원들은 ‘미혼 현황판’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황 장관은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라’는 뜻에서 현황판을 붙여 놓았다고 변명한다. 하지만 직원들은 불쾌할 수밖에 없다. 결혼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이자 개인의 행복권과 자기결정권과도 직결된 문제다. 그런데도 장관이 직접 나서 공적인 ‘과제화’하다니, 무슨 권한으로 그러는 건지 묻고 싶다. 사생활 침해이며, 약자에 대한 강자의 소리 없는 폭력이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대통령과 장관이 청년취업난과 결혼·출산 기피 현상을 해소하고자 고심하다보니 그렇게 처신한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말초적 인식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는 거다. 사고의 더듬이를 조금만 더 넓게 펴도 ‘문제가 되는 처신’라는 걸 단박에 알 텐데 안타깝다.

‘중동 발언’과 ‘현황판 결혼 독려’는 본질을 호도하는 일종의 ‘기만극’이다. 제 나라에서 열심히 일하며 살 수 있는 환경을 모든 국민에게 만들어 줄 책무가 대통령에게 있다. 그런데 정부는 청년들에게 어떻게 했나. ‘고용률 70%’라는 공약을 내세웠지만 정작 한 일은 기간제 근로자 등 ‘나쁜 일자리’를 늘리는 데 급급했다. 정부가 ‘수치놀음’만 한 셈이다.



절망하는 청년들에게 먼저 무릎 꿇어야

결혼 문제도 마찬가지다. 어느 누가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걸 싫어하겠는가. 취업난, 치솟는 전월세, 미래에 대한 불안, 교육비와 양육비 부담 등으로 결혼할 엄두도 못 내는 젊은이들이 너무도 많다. 오죽하면 연해,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을까. 안정된 직장을 가진 교육부 직원들도 결혼을 꺼려할 정도라면, 상당수의 청년들에게 결혼과 출산은 못 오를 나무다.



‘중동이나 가라’고 등 떠밀고, 결혼 다그치며 ‘미혼현황판’ 만들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런데도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만 한다. 취업이 안 돼 얼마나 고통스럽겠느냐, 청년실업 해소할 대책 마련하지 못해 대통령으로서 송구할 뿐이다, 이런 얘기를 먼저 해야 한다. 청년들에게 미안하다고 무릎 꿇기는커녕 대통령의 치적인 양 떠들며 ‘중동 가라’고 하는 건 기만행위나 다름없다.

‘삼포세대’로 살게 해서 죄송하다, 결혼과 출산이라는 당연한 권리와 행복을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정부가 무한 책임을 느낀다, 이렇게 나오는 게 맞다. 결혼을 포기하게 만든 잘못이 정부에게 있다고 인정하기는커녕 미혼자 현황판이나 그리는 행위 또한 본질을 흐리는 사기이자 기만이다.



‘신곡’은 말한다, 대통령과 장관 처신은 ‘중죄’라고

다시 ‘신곡’으로 돌아가 보자. 진정한 고전에는 시대와 문명의 경계를 관통하는 힘과 가치가 있다. ‘신곡’은 순례자처럼 살다간 단테가 진리의 궁극인 하나님의 존재를 통해 삶과 구원의 문제를 성찰한 고전이다. 진리와 구원의 길을 찾아 나선 이들의 길잡이이기도 하다.

단테는 기만과 사기가 색욕, 탐욕, 분노, 폭력보다 더 중한 죄라고 말한다. 물리적 상처보다는 정신적 상처가 더 큰 고통이란 얘기다. ‘중동 발언’과 ‘미혼현황판’은 많은 청년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는 마음의 상처로 남기 십상이다.

박 대통령과 황 장관의 처신이 대수롭지 않은 거라고 말하면 안 된다. 인류역사를 통털어 뛰어난 고전 중 하나인 ‘신곡’은 말한다. 두 사람의 처신은 ‘기만’이라는 중죄에 해당한다고.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