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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내 선거 부정을 고발한 어떤 장교

  • 입력 2015.03.23 12:30
  • 수정 2015.03.23 13:43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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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장교의 양심선언

14대 총선을 이틀 앞둔 1992년 3월 22일 밤이었다. 준수하게 생긴 육군 중위 한 명의 입에서 놀라운 사실이 흘러나왔다. 그는 백마부대 소속 소대장 이지문 중위였다. 12년 전 사단장 노태우 소장의 명령으로 전방에서 탱크를 빼돌려 서울로 진입했던 바로 그 부대다.



하지만 이지문 중위가 임지를 떠나 서울로 온 이유는 12년 전과 정반대였다.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군 부재자 공개 기표, 중간검표 등 군대 내에서 자행된 민주주의의 압살을 고발했다. “여당 후보를 지지할 것과 공개 투표를 강요했습니다. (중략)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 적잖은 갈등을 느끼고 있고 무엇보다 동료, 선배 장교들에게 돌아갈 불이익 때문에 가슴이 아픕니다.”

국방부는 경악했다. “아니 운동권 출신의 작대기 두세 개짜리가 튀어 나가서 떠들어댄 것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두 개를 단 육군 중위이자 소대장이 지금 대체 뭐라고 하는 거냐? 뭐 저런 놈이 장교가 됐지? 저런 운동권이 어떻게 ROTC가 됐어?” 그러나 이지문 중위는 운동권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과 동기였던 동아리 선배에 따르면 이지문 중위는 ‘87년 6월 정도에나 데모를 따라 나가 봤을까? 그 뒤에는 전혀 운동권이 아니었고 그냥 수업 잘 들어가던 ‘범생이’였다.



사소한 이유

튀지도 않고 나대는 성격도 아니었던, 오히려 내성적이었다는 육군 장교가 어떻게 군대 안의 선거 부정이라는, 공공연한 비밀이자 동시에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을 폭로하게 됐을까? 사회평론 길지 3월호에서 이지문은 이렇게 얘기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군에 들어간 사람도 많았는데 어떻게 내가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 저도 설명이 잘 안됐어요. 그런데 작년에 대전에서 밤차를 타고 올라오다가 '아마 내가 처한 상황이 이런 경우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했어요. 바로 앞자리에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술 취한 남자 두 사람이 타서 그 여자 옆자리에 앉아 자꾸 치근덕대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내가 자리를 바꿔주었지요.

그리고 나니 이 술 취한 사람들이 행패를 부릴까 봐 은근히 겁이 나대요? 내가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그냥 가만히 있었어도 됐을 겁니다. 부정선거 고발도 바로 그런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병이라면 부대 밖으로 나가면 바로 탈영이라 나갈 수 없었을 테고 또 우리 부대가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었으면 못했을 텐데 부대 밖으로 나가면 바로 1시간 안에 광화문까지 도달하는 버스가 있었으니까요."


자리가 달랐다면 가만히 있었으면 될 일. 그가 만약 제대를 기다리는 육군 병장 이 병장이었다면 아마 양심선언은 없었을 것이다. 눈 딱 감고 연대장 시키는 대로 1번 찍어 눈앞에 보여 준 뒤 “이 병장 제대 며칠 안 남았지? 말년 휴가에 특박 더 끊어 줄까?” 하는 자상한 배려를 받으면 됐을 것이다. 육군 쫄다구 주제에 무슨 민주주의고 나발이냐 말이다.



예정된 순서, 양심에 대한 대가

하지만 이지문 중위가 장교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충성, 명예, 단결’을 부르짖는 대한민국 육군 장교였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지문 중위로 하여금 ‘과연 이 부정선거는 누구에 대한 충성이며, 얼마만큼의 명예로운 일이며, 나아가 이 옹졸한 단결 혹은 담합은 필요한가?’ 에 대해 의심하게 됐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역시 단결(?)로 이지문 중위에 맞선다. 전 부대원 수백 명의 연대 서명을 받아 “그런 일 없었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지문 중위는 갖가지 혐의를 뒤집어쓰고 불명예 제대한다. 입사 전 확정되어 있던 삼성그룹 입사도 당연히 취소된다.

그러나 익명의 제보들은 쏟아져 나왔고 국군 통신사령부 이원섭 일병이 나서 이지문 중위의 진실을 뒷받침한다. 이런 용기들은 군 부재자 투표 제도를 개선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그 의미를 설명하자면 간단한 예 하나만 들면 된다. 우리 군은 70만 대군을 헤아린 반면 5년 뒤의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50만 표 차이로 당선되는 것이다.



숨죽인 지지, 보통 사람들

그 와중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본의 아니게 악의 대열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이지문 중위의 직속상관인 중대장은 육사 출신의 글자 그대로 FM의 군인이었다고 한다. 정의를 숭상하고 명예를 목숨같이 여기던 그는 선거 관련 정신 교육을 하다가 그만 뒤돌아서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러면서도 “1번을 찍어 달라.”고 말하며 내무반을 황급히 떠나야 했다. 양심선언 후 헌병대에서 마주했을 때 이지문 중위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며 양해를 구하자 그 중대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네 일이 있기 전부터 정신교육을 시키지 않아 연대, 사단, 나아가 군단에서까지 찍혀있으니까 너로 인해 더 큰 피해를 입을 것이 없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보듯이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



드레퓌스 사건 : 1894년 프랑스 군대에서 복무하던 드레퓌스가 단지 필적이 비슷하단 이유만으로 간첩죄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던 사건. 이 사건은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라는 논설로 프랑스 전역에 정치적 이슈가 되었고 드레퓌스는 12년 만에 재심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 편집자 주

이 멋진 장교는 기자들이 “이지문 중의의 말이 전혀 사실이 아니냐?”고 캐물을 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이라고 입을 떼고서도 “내성적인 성격 탓에 사물의 부정적 측면만을 집중적으로 예리하게 바라본 듯하다.”는 엉뚱한 답변을 내뱉어야 했다.

이지문 중위는 그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과연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물론 그가 비겁하다고 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분노를 터뜨려야 할 대상은 한 용감한 젊은 군인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던 사람들일 것이다.


23년 후, 여전히 유효한 이지문 중위의 고백

92년 바로 그 선거에서 야당의 맹장이었던 홍사덕의 지역구에서는 안기부 요원이 흑색 유인물을 뿌리다가 덜미를 잡힌 일도 있었다. 당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선거판은 그만큼 개판이었다. 과연 그때 경찰서에서 참담한 표정 짓고 있던 안기부 직원들은 명색이 정보기관 요원으로서 홍사덕의 치부(?)를 담은 찌라시들을 자신들의 손으로 뿌리고 싶었을까? ‘내가 이 짓 하려고 안기부 왔냐’라며 탄식하지는 않았을까?

지금까지 근 사반세기 전의 얘기를 했다. 그 세월 동안 우리는 열심히 나아갔다고 생각했는데 어인 연고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는지 어안이 벙벙해지는 요즘이다. 국정원은 대놓고 선거 개입을 요구했고 엘리트 공무원들은 댓글 놀이를 해야 했다. 물론 그 짓을 진심으로 애국이라고 믿는 자들도 있을 수는 있다. “여당 지지가 32%밖에 안되어 북한의 선전재료가 되고 있다.”고 병사들에게 강조한 이지문 중위의 연대장처럼 말이다.



하지만 전직 ‘가카’의 학교 후배로 알려진 국정원 댓글녀 김씨. 돌돌 만 목도리 위로 불안한 눈동자만 굴리던 그녀는 과연 그 일을 좋아서 했을까.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고, 반대 의사를 표하던 그녀는 그때 국가와 민족을 생각했을까? 그 와중에 국정원장이라는 작자는 그를 보다못해 외부에 누출한 이를 잡고자 눈에 불을 켰고 그를 파면시켰다. 그 비양심도 모자랐는지, 몰래 퇴임식을 하고 태평양 건너갈 기획을 하고 있었다. 붙잡힌 그는 ‘자신은 대공 활동을 했을 뿐’이라며 늙다리 추물 군복들의 '호위'를 받으며 재판을 받으러 왔다가 법정 구속됐다.

1992년 3월 22일 양심선언을 했던 이지문 중위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떠나고) 중대장님과 동료 장교들, 그리고 우리 소대 사병들은 군에 남아 있게 되었지만,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그리고 각자 사회를 보는 눈이 다르다 하더라도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양심적이면 항상 같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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