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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 목소리, 그리고 악마의 목소리들

  • 입력 2015.03.13 14:18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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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3월 13일, 그로부터 44일 전 유괴된 소년 이형호가 잠실대교 옆 배수구에서 끝내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부검 결과 아이는 유괴 당일 친구 집에서 먹은 음식 이후 먹은 것이 없었습니다. 즉 아이는 유괴 당일 세상을 떠난 겁니다.


숨진 이형호 군과 범인의 몽타주


아이를 죽인 범인은 그래 놓고도 무려 44일 동안 60여 차례의 전화통화와 10차례의 메모지로 피해자의 부모를 협박하며 돈을 요구했고, 그 메모지 모두에 지문 하나 남기지 않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몇 번 돈을 찾기 위해 은행에도 나타났으나 사고계좌임을 눈치채고 달아났고 경찰의 추격을 따돌리며 범인을 유인하기 위해 갖다 둔 돈가방까지 유유히 가져가 버렸지요. 그것이 가짜 돈가방이라는 사실을 알곤 그는 이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종적을 감춥니다.

아들을 보고 싶지 않은 것으로 알겠다.

영화 ‘그놈 목소리’에 등장하는 그놈의 목소리는 정말 소름이 끼치도록 냉정하고 사악합니다. 당시 30대, 지금은 40~50대가 되었을 범인의 목소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뱀 혓바닥이 귓바퀴를 쓰다듬듯 징그럽기 짝이 없어요. ‘그놈 목소리’를 만든 박진표 감독은 한때 내 사수였어요. 그 형이 <그것이 알고 싶다> 조연출을 할 때 이형호 군 관련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몇 년이 흐른 뒤에도 그놈만큼은 꼭 잡아야 한다고 이를 갈곤 했는데 기어코 영화로 제작했더군요.

그 선배가 아직 우리 회사에 있을 즈음, 저는 또 한 번 악마의 목소리에 진저리를 친 적이 있어요. 이름이 너무도 특이했던 한 예쁜 소녀가 그만 유괴범의 마수에 걸리고 말았던 겁니다. 협박 전화 오디오를 베타 테이프로 옮기며 듣고 있는데, 부모에게 어찌 어찌 행동하라고 지시하는 가운데 만약 그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를 얘기하면서 범인은 이렇게 뇌까립니다.

그럼 OO는 영원히 못 보는 거지.

아 그때 진짜 내 입에서 상욕이 튀어나왔어요. 증오가 아니라 공포 때문에요. 욕이라도 퍼붓지 않고는 그 공포를 못 이길 거 같더라고요. “그럼 OO는 영원히 못 보는 거지.” 분명히 가성을 쓰는 데다 ‘거지’에서 끝을 올려서 왠지 나긋나긋하게까지 들리는 그 목소리는 지옥에서 온 악마와 닮아 있었어요.

다행히 범인은 잡혔습니다. 기절할 만큼 놀란 것은 그녀가 악마는커녕, 전과 하나 없던 젊은 여자였고 배가 남산만큼 불러 있다는 사실이었죠.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던 경찰이 범인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카페를 급습했을 때 그녀는 학교 후배들과 함께 대화 중이었어요. 경찰이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을 죄다 조사하려 하자 후배들이 나서서 임산부에게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따졌고, 경찰도 그에 수긍하고 그녀를 그냥 내보냈다고 해요. 좀 있으면 애를 낳을 엄마, 가난하긴 하지만 연극인을 함께 꿈꾸는 남편이 있었던 아내가 티없이 맑은 얼굴의 아이를 유괴하고 질식시켜 죽였던 겁니다. 역시 유괴한 직후에요.


검거 당시 범인의 모습. c MBC


그녀는 쉽게 자백하지 않았어요. 가상의 인물에게 협박을 당했다는 둥 허위 사실을 그림처럼 지어내어 혐의를 줄여 보려고 발버둥을 쳤고 체포 직전에는 남편에게 ‘나 혼자 한 거 아니야. 시킨 대로 했어.’라고 문자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잡혀가는 아내 앞에서 남편은 울부짖었지요.

네가 아니잖아. 네가 한 거 아니잖아. 사실대로 말해! 너 이런 짓 할 애 아니잖아.

유복한 환경에서 별 탈 없이 자라났다는, 가난하지만 순수한 사랑을 택해 부모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섰던 한 젊은 여자는 악마로 변해 있었습니다.

PD 선배가 편집하다 화장실 간 틈을 타서 저는 그녀의 얼굴을 스틸로 잡아 두고 뚫어지게 바라봤었어요. 임신으로 얼굴이 푸석푸석해지고 살이 붙어 더욱 그랬지만 어디 하나 뾰족한 구석이 없는 얼굴이었답니다. 전철 안에서 그녀를 봤더라면 스스럼없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할 임산부였고, 악의가 없어 뵈는 보통 사람이었어요.

그날 그녀의 얼굴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면서 저는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녀를 악마로 만든 건 생활고와 카드 빚이라는 아주 평범하지만 독기 넘치는 송곳니들이었지요. 형호를 유괴해서 죽여 버린 후 그 미칠 것 같은 목소리만 남기고 사라진 악마도 어쩌면 자식을 키우는 부모였을 수도 있고, 비슷한 사건이 발생하면 ‘애 가지고 나쁜 짓 하는 것들은 다 태워 죽여야 돼.” 하면서 비분강개하는 아저씨였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어떤 계기로 그는 악마 짓을 감행할 이유를 갖게 되었을 것이고, 그 악마성을 스스로 합리화할 핑계를 찾았을 테고, 그 악마의 목소리를 남기면서도 자신이 들춰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독사의 새끼들이 되어 갔을 겁니다.

세계적으로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고, 생활고에 시달리다 못해 애들을 아파트 밖으로 내던지고 자신도 그 뒤를 따르는 일들이 이제는 그닥 신통한 뉴스 거리도 못 되는 나라에서 앞서 말한 두 유괴범 같은 악마가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요. 저라도 대책 없이 해고되어 카드 빚으로 연명하다가 빚쟁이들한테 못 볼 꼴을 당하고, 희망마저 안드로메다에나 있다고 한다면 악마가 되지 말란 법이 있겠나요. ‘그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라는 합리화만 된다면요.

절대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는 없는 얘기겠지만 20년 전 형호 군의 시체가 발견된 오늘,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화두가 떠올랐어요. 또 결코 비슷한 범주의 범죄자가 아니지만 수많은 유태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아이히만을 바라보면서 한나 아렌트가 쏟아냈던 탄식,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악마적이지도 않았다.”는 말도 스멀거리면서 기어 나왔고요.


c EBS


갑갑한 맘으로 그녀의 글을 다시 읽다가 어떤 대목에서 덜커덕 발목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는 근거가 주어졌을 때, 선량하고 바람직한 성품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쉽게 악마화 되었던가를 통찰하면서 아렌트가 남긴 말이 있거든요.

그로 하여금 당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이 아닌, 순전한 ‘생각 없음’이었다.

발목이 걸린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2011년 3월 12일 일본에서 일어난 대참사와 관련한 또 다른 형태의 목소리들 때문이었어요. 제 아들도 당시 쪽발이들 어쩐다 해서 제게 상욕을 들었습니다. 아무리 철이 없어도 수천 명이 죽어간 전 지구적 대참사를 두고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제가 교육을 잘못 시킨 탓이었겠죠.

그런데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프로필 상에서 사대강반대 어쩌고 하는 정치적 입장까지 표할 줄 아는 어른들과 ‘사랑의 하나님’을 찾느라 목청 뜨거운 일부 기독교인들, 심지어 목사들이 토해내는 트윗들은 형호를 죽인 그 악마와 미지를 목 조른 목소리만큼이나 사악하고 독살 맞게 제 귀를 찔렀습니다.

“쪽바리 새끼들 뒈지는 게 어때서?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수만 명을 죽인 것들인데!”

“저는 일본인이 전부 쓰나미에 쓸려가도 손톱만큼의 동정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본은 추후 청산의 대상일 뿐이고 전쟁을 해서라도 전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름 팔로워도 만 명이 넘고, 열혈 민족주의자에 진보를 자처하는 이 사람의 발상은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헛소문에 경도되어 조선 사람을 보는 대로 죽창으로 찔러댔던 일본인 자경단과 완전히 같습니다. 제 아무리 의로운 분노라 해도 인간에 대한 애정을 결여하고 있다면 그건 스스로를 태울 불길일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악마는 커 가겠죠.

악마의 목소리를 더 들어 봅시다. 이번 악마의 목소리는 분노가 아니라 자비와 용서의 가성으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나긋나긋하지만 금세 지긋지긋해지는 목소리지요.

일본 8.8규모의 대지진이 발생했네요. 주여, 주여. 도우시옵소서. 일본땅의 모든 우상들이 파괴되고 복음이 증거 되게 하옵소서.

대체 뭘 도와서 어떻게 해 달라는 건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이런 말도 등장합니다. ‘많은 우상을 믿는 일본이 심판을 받았음! 계시록 18장.’ 지진이 하나님의 벌이라는 선언에 뒤이어 목사를 참칭하는 이의 절절한 호소는 그야말로 ‘종결자’가 됩니다.

천지를 운행하시는 전능자 하나님을 등지고 800만 귀신을 섬기는 일본, 총리로부터 서민까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해야 합니다.

물론 이 목소리들은 그리 크게 울림이 있지 못해요. 하지만 그것이 제 고막을 괴롭혔던 이유는 그 악마성이 너무나 참람하고 뚜렷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저 말을 하는 사람들이 결단코 정신질환자라거나 허무맹랑한 망상의 보유자들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성실히 일하고, 용감히 나서기도 하며, 무척이나 바람직한 성품을 지닌, 심지어 저보다 더 정상적인 인물일 수도 있다는 것 때문에 더 두려웠겠지요.

과거의 죄악이 있기 때문에, 너희들이 한 짓이 있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다는 악마는 아이히만의 동포들과 관동대지진 이후의 일본인들에게도 깃들었던 같은 녀석입니다. 어서 회개하라고, 회개하지 않아서 너희들이 이 모양 이 꼴을 당한 것이라고 우기는 악마는 바로 남의 절에 들어가서 땅 밟기를 하고, 절간이 무너지기를 기도하며 단군상 목을 치고, 자신들의 종교에 반한다는 이유로 정부의 결정을 무산시킨 대마왕의 졸개들이기 십상일 겁니다.

시덥잖은 음성일지언정 악마들의 목소리에 매우 예민한 이유는 나 또한 악마가 될 수 있는 자이며, 악마란 특출한 사악함이 아닌, 상상 이상의 ‘생각 없음’과 끔찍한 자기합리화의 통정으로 인해서 태어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라고 여겨 봅니다. 저는 더 이상 악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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