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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

  • 입력 2015.09.09 19:02
  • 수정 2016.12.03 16:58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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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입학하던 무렵 학교 앞 백반 값은 1,200원이었다. 학교 구내 식당 장국밥은 450원이었다. 간단히 얘기해서 ‘세종 대왕’ 한 분만 계시면 학교 안에선 근 20명이, 학교 밖에서도 8명은 넉넉히 배를 채울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서울 출신이거나 서울에 끈이 있는 학생들은 당시만 해도 ‘몰래바이트’라 불렸던 과외를 하면서 한 달에 25~30만 원의 고소득을 올렸다. 밥값에 비추어 그 시세를 가늠해 보면 요즘 돈 100-120만 원의 짭짤한 수익인 셈이었다. 데모로 시끌벅적하던 때였고 배를 곯고 다니는 학생들도 많았지만 캠퍼스는 나름 풍성했다. 사회적 분위기도 그랬다. 80년대의 ‘3저 호황’으로 인한 경제 호황과 88 서울 올림픽의 후광은 여전히 그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1990년 봄이 왔을 때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일단 학교 앞 밥값이 1,500원으로 단번에 올랐다. 일거에 25퍼센트가 훌쩍 뛴 것이다. 천오백 원, 이천 원 하던 돈가스는 거의 100퍼센트 상향 조정이 됐다. 하숙비도 들썩들썩했다. 하숙비를 감당하지 못해 짐 싸들고 친구 자취방이나 학생회관을 전전하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 당시의 물가 상승 지수를 굳이 찾아보지 않더라도 80년대의 호황과는 사뭇 다른 이상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캠퍼스에서 일어난 일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국민은행 통계에 따르면 1990년 서울 전셋값 상승률은 23.7%에 달했고 그 전 해에는 29.6%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80년대에서 90년대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전셋값이 무려 60퍼센트 넘게 날아오른 것이다. 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신도시 건설에 이르기까지 전국을 휘몰아친 부동산 열풍과 인플레이션의 파도가 쓰나미로 화하여 서민들의 터전을 덮친 결과였다.

“폭등하는 부동산 가격에 내 집 마련의 꿈은 고사하고 매년 오른 집세도 충당할 수 없는 서민의 비애를 자식들에게는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1990년 4월 10일 온 가족이 함께 세상을 등져 버린 한 가장의 유서다. 그의 아이들은 일곱 살, 여덟 살이었다. 유달리 춥고 눈도 많이 왔던 겨울을 거쳐 찾아왔던 1990년의 봄은 겨울만큼이나 삭막했다. 3월과 4월 사이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해 죽어간 이의 수가 17명에 달했던 것이다.




이즈음 한겨레 지면을 장식하던 박재동 선생의 만평 하나를 나는 선명하게 떠올린다. 어느 허름한 방 안 튀어나온 듯 충혈된 아버지가 쭈그리고 앉아 있고 달랑 있는 장롱 위에는 언제든 이사 가야 할 처지를 상징하는 듯한 짐 보따리가 얹혔다. 아버지 앞의 남매는 아버지에게 뭔가 다급하고 애타게 말하고 있었다. 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말이었던 것 같다.

“아빠 우리 안 죽일 거지?”

그 무렵 그렇게 바닥으로 눈을 내리깔던 아버지는 한 두 명이 아니었고 그 가운데 몇 명의 눈은 실제로 살기에 뒤집히기도 했다. 오죽하면 1990년 4월 전셋값에 치어 죽어간 17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까지 열렸을까. 경실련과 전국세입자협의회가 개최한 이 합동 위령제에서 세입자들은 또 다시 다가올 가을 이사철을 걱정하고 있었다.

1990년 봄은 실로 봄이 왔으되 봄 같지 않았던, 활짝 피어났지만 맥없이 떨어지는 꽃잎들처럼 많은 생명들이 세파에 휩쓸려 갔던 나날이었다. 그 해 봄의 가장 슬픈 죽음으로 나는 이 사건을 들어 보고 싶다. 그 죽음은 전셋값 때문에 들이닥친 것은 아니었지만 가난이 깎아지른 벼랑에서 떨어진 것은 동일하다.

1990년 3월 9일 서울 마포구 망원동의 한 연립주책 지하방에서 불길이 솟았다. 발견자는 청소를 하던 중 난데없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이웃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는 부리나케 연기 나는 곳으로 달려갔지만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다행히 안에는 사람이 없구나 가슴을 쓸어내린 아주머니는 알음알음 수소문하여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던 집주인과 인근 합정동에서 파출부 일을 하던 그 아내에게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숨이 턱에 닿도록 집으로 달려온 어머니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애들이! 애들이 안에 있었어요.”

모두는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문을 밖으로 잠근 것은 부모들이었다. 부엌에만 나가도 연탄불이나 식칼 등 다칠 구석이 많고 밖에라도 나가면 길이라도 잃을까 두려웠던 부모는 다섯 살 세 살 아이들을 방 안에서 놀게 하고 문을 잠갔다. 조금만 있으면 엄마가 올게 약속을 남기고. 그러나 아이들은 살아서 엄마를 보지 못했다. 아이들은 그 작은 손톱으로 열리지 않는 문을 긁어대다가 화마에 휩싸였다. 다섯 살 혜영이는 방바닥에 엎드린 채, 세 살 영철이는 옷더미 속에 코를 박은 채 숨져 있었다.




부부는 충청도에서 농사를 짓다가 도저히 가난을 이길 수 없어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었다. 살려면 일을 해야 했고 남편 혼자 힘으로는 벅찼다. 아내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지만 걸리는 것은 아이들. 시골 어머니에게 보냈다가 “더 이상 못 맡겠다.”는 말과 함께 되돌아왔고 돈을 쪼개 이웃에게 주며 아이들을 봐 달라고 부탁해 봤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끝이 났다. 그렇다고 아내가 집에 들어앉자니 오르기만 하는 집세와 늘어가는 빚더미가 하늘같았다. 대책은 하나 문을 잠그고 나가는 것 뿐 이었다. 다섯 살 누나에게 세 살 동생을 데리고 잘 놀라는 당부만이 가난한 부모가 할 수 있는 조처의 전부였다. 그리고 아이들은 성냥을 가지고 놀다가 화마에 휩싸였다.

이 사건은 당시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내게도 매우 껄끄러운 기억을 심어 주었다. 사건 발생 얼마 후의 어느 날, 술 한 잔 걸치고 버스 차창에 머리 기대고 잠을 청하는데 뒤에 앉았던 중년의 부부가 남매의 일을 화제 삼는 것이 들렸다. 건성건성 넘기고 있는데 둘의 대화가 갑자기 화전(火箭)이 되어 내 귓전을 뚫고는 머릿속에서 폭발했다.

“몇 푼이나 번다고. 여편네가 문 잠그고 나가서 그 지랄을 하게 했는지. 남편이나 여편네나 똑같다.”
“맞아요. 무조건하고 애들은 엄마가 있어야 돼.”

솔직히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고 시내버스 승객에 그 행색도 “싸장님”과 “싸모님”도 아니었다. 나름 슬퍼서 하는 말이었고, 안타까움을 표한다는 것이 좀 지나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부는 내게 봉변을 당했다. 다음 정거장에서 올라탄 선배가 끼어들고 혼이 빠진 부부가 황급히 내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경찰서 신세를 졌을지도 모른다. 마치 내가 죽은 아이들의 아비라도 되는 양 악을 썼고 엄마라도 되는 양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퍼부어댔으니까. 20년도 더 전 버스 안에서 웬 술 냄새 풀풀 풍기는 젊은 놈의 느닷없는 발악에 혼비백산했을,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음직한 당시의 중년 부부께 이 자리를 빌려 사죄의 뜻을 표한다.

그때 나를 화나게 했던 것은 하나의 명제였다. “애들은 엄마가 길러야지!” 어찌 보면 당연한 명제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명제는 어쩌면 가장 옳은 명제인지도 모른다. 법대로 하면 되고, 가정은 지켜져야 하며,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야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명제처럼. 그러나 그 옳고 지당한 책임을 사회가 전담 내지는 분담하지 않고 개인에게만 떠밀 때, 옳아서 더욱 단단하고 마땅하여 배로 갑갑한 명제는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동아줄이 아니라 그 목을 잡아 죄는 올가미 줄로 변신한다. 남의 집 마루를 닦아 번 30만원을 몽땅 빚 갚는데 들이부어야 살아갈 수 있었던 어머니에게 그 명제는 무엇이었을까.




아이들이 죽은 6개월 뒤였던 90년 10월,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라고 단언하는 노래 하나가 세상에 나왔었다. 공륜 심의를 거부한 탓에 방송으로는 들을 수 없는 노래였지만 그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쏟은 사람들의 입소문으로 퍼져 갔던 노래다. 가수 정태춘씨가 부른 <우리들의 죽음>이었다. 정태춘 5집 음반에 실린 이 노래는 정태춘씨의 낮게 깔리는 음성도 음성이지만 간간이 삽입된 가슴 찡한 내레이션으로 더욱 유명했다. 마지막 내레이션은 아이들의 것이었다. 이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 대목에서 눈물을 쏟았다.

“엄마 아빠 슬퍼하지 마. 이건 엄마 아빠의 잘못이 아니야. 여기 불에 그슬린 옷자락의 작은 몸뚱이를 두고 떠나지만, 엄마 아빠 우린 이제 천사가 되어 하늘나라로 가는 거야. 그런데 그 천사들은 이렇게 슬픈 세상에는 다시 내려올 수가 없어. 언젠가 우린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겠지. 엄마 아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운 가장 예쁜 말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이제 안녕”

1990년 3월 9일. 감당할 수 없는 전셋값의 벼랑에 온 가족이 함께 몸을 던지는 일이 줄을 잇던 즈음, 맞벌이가 아니면 연명조차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격증하던 시기의 초입에서 어린 남매는 죽어갔다. 앞만 보고 달려온 고도성장의 동력이 사그라들고 그 그늘 속 절망과 슬픔은 깊어지던 90년대의 신호탄이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인간적인 구석이 남아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속절없이 사람들의 뉴스가 연이어 사람들의 귓전을 때렸고 합동 위령제를 지내며 그들의 죽음을 아파하는 몸짓들이 형식적으로나마 전개됐던 것이다. 하루에 수십 명이 목숨을 끊어도 신문 한 귀퉁이 차지하기 어렵고 한 공장 출신의 해고자들 수십 명의 생명이 연이어 사라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게 된 요즘에 비하면 그나마 따뜻했지 않은가.

불행한 남매 영철이와 혜영이의 죽음, 그리고 그를 담은 노래 <우리들의 죽음>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진보 진영에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한 최고의 전문가로 손꼽혔던 손낙구씨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그의 저서 <부동산 계급사회> 서문에서 자신이 왜 부동산에 몰두했는지의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가수 정태춘이 눈물로 부른 <우리들의 죽음>이란 노래가 있다. 1990년 3월 9일 어느 맞벌이 부부의 어린 자녀가 비극적으로 숨진 사건에 얽힌 사연을 담았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2005년 10월 11일 서울 서초구 원지동 '개나리 마을', 빈민들이 비닐하우스로 집을 짓고 사는 이곳에서 엄마가 공장에 야근하러 간 사이 불이 나 여섯 살, 네 살 박이 형제가 불에 타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지하 셋방이나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다가 채 인생의 꽃을 피워 보지도 못하고 불에 타 죽어야 하는 아이들 앞에서 명색이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에 몸담아 온 사람으로서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15년 동안 나는 과연, 과연 무엇을 했단 말인가'라고."

그로부터 몇 년간 손낙구는 필사적으로 대한민국의 깊숙한 근저에 똬리를 틀고 앉아 사방의 자양분을 빨아들이고 있는 부동산이라는 괴물과의 사투를 벌이게 된다. 그 노력의 결정적 계기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참으로 서글프게 세상을 떠난 아이들과 부모들의 눈물이었다. 항상 그렇듯, 깊어가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틔우려는 노력은 영글어 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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