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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에 맞섰던 그 소녀는 왜 영웅이 되지 못했을까

  • 입력 2015.03.04 13:32
  • 기자명 뉴스페퍼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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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버스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로자 파크스는 인종차별에 맞선 아이콘으로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9개월 앞서 똑같은 행동을 했지만, 유명해지지 않은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당시 15세 여학생이었던 클로뎃 콜빈(Claudette Colvin)입니다.




1955년 3월 2일, 클로뎃은 친구 세 명과 함께 버스를 탔습니다. 앞좌석 10개는 백인전용이었기 때문에, 소녀들은 중간쯤에 자리를 잡았죠. 하지만 점점 탑승객이 늘어나면서 한 백인 여성이 자리없이 서있게 되자, 버스 운전수는 클로뎃과 친구들에게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즉시 일어난 친구들과 달리 클로뎃은 자리에 앉은 채 버텼죠. 출동한 경찰에게 클로뎃은 “나도 요금을 냈어요. 이건 헌법에 명시된 내 권리예요.”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소용없었죠. 클로뎃은 수갑을 찬 채 성인 구치소로 끌려갔고, 부모가 온 다음에야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그 날, KKK단의 보복을 두려워한 클로뎃의 아버지는 장전한 소총을 끌어안고 밤새 한 잠도 자지 못했습니다. 클로뎃은 많은 친구를 잃었습니다. 부모들이 극단주의자와 어울리면 위험하다며 클로뎃과 놀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죠.

그 전에도 백인에게 버스 좌석을 양보하지 않은 흑인은 여럿 있었습니다. 그러나 클로뎃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변호사를 선임하고 법정 투쟁을 벌이기로 결심합니다. 당시 몽고메리에는 흑인 변호사가 단 두 명 있었고, 클로뎃은 그 중 한 사람인 프레드 그레이를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그레이 변호사는 흑인 커뮤니티의 원로들과 의논한 결과, 소송을 유보하기로 합니다. 클로뎃이 너무 어리고 민권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죠. 클로뎃은 사건이 있은지 얼마 안 가 16세 때 결혼하지 않은 몸으로 임신을 하게 됩니다.



“저는 아마 사람들이 앞에 내세우고 싶은 인물이 아니었을 거예요. 너무 전투적이었으니까요.”

9개월 후, 로자 파크스 사건이 일어납니다. 16세의 미혼모 클로뎃과 달리, 로자 파크스는 42세의 점잖은 직장인이자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NAACP)의 임원이었습니다. 민권 운동 지도자들이 찾아 헤매던, 운동의 심볼이 될 만한 인물이었죠. 1956년 그레이 변호사는 그 유명한 브라우더 대 게일 재판에서 승리하면서, 앨라배마 주 대중교통에서 인종 분리 정책을 철폐시키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클로뎃은 이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해 중요한 역할을 했죠. 그레이는 클로뎃이 민권 운동의 이름없는 영웅 중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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