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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로 흥한 세종대왕, 인사로 무너지는 박근혜 정권

  • 입력 2015.02.16 15:02
  • 기자명 오주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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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 3년차. 사람의 나이로 본다면 왕성하게 일을 할 수 있는 30~40대 정도에 해당한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이미 노쇠한 것처럼 보인다.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고 동력이 이미 크게 떨어진 상태다. 나이는 이제 갓 중년인데 몸은 이미 노년기다.



박 정권 3년차, 나이는 갓 중년 몸은 노년기

무엇이 박근혜 정부의 조로(早老)를 부추기는 걸까. 국가기관 대선개입이나 세월호 참사 때문만이 아니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인사 참사와 불통을 지지율 추락의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또 불통 인사를 밀어붙이려고 안달이다.




국민 대다수가 이완구 총리후보자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는데도 정부여당은 국회 과반의석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기 삼아 단독으로라도 표결 처리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박 대통령의 ‘텃밭’인 대구-경북에서조차 반대 의견이 50%를 넘는데도 무조건 밀어붙일 태세다.

국민을 위한 총리를 뽑아야 하는데도 대통령을 위한 총리를 앉히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부적합’ 여론이 높아 낙마했던 역대 어느 총리후보자보다 의혹이 더 많은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 후보자가 국회 청문회에서 거짓 증언을 한 게 명확한데도 괘념치 않은 채 ‘충청도 지역감정’까지 부추기는 등 막장 꼼수까지 동원한다.



‘만신창李’ 임명 강행, ‘댓글 무마 권영세’와 ‘세월호 면피 김장수’ 중용

이완구 총리 후보 사태만도 국민들은 버거울 지경인데 NLL 남북대화록 불법공개와 국정원 댓글 사건 덮기 음모의 핵심이었던 권영세 주중대사를 청와대 비서실장 혹은 통일부장관으로 중용하겠다고까지 한다. NLL 대화록을 대선에 활용하는 데 앞장섰으며 “우리가 집권하게 되면 (NLL 대화록을) 까고”라고 말했던 사실이 공개돼 파문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또 권 대사는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 축소·은폐 외압 혐의로 기소됐던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배후이자, 대선 3일전 급조된 경찰의 엉터리 중간수사발표에도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국정원과 가깝다. 안기부장(옛 국정원) 특보실 파견 검사를 지냈으며 국정원 관련 상임위인 국회정보위원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세월호 유족들의 가슴에 대못질한 사람도 중용됐다. 박 대통령은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는 재난 콘트롤타워가 아니다.”라는 회피성 발언을 해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던 김장수 전 국가안보실장을 주중대사로 내정했다. 청와대 초동 대응 미숙과 책임회피성 망발로 경질됐던 사람인데도 9개월 만에 다시 요직에 복귀시킨 것이다.



국민 아닌 대통령 1인을 위한 인사

인사권자인 박 대통령의 눈높이에만 맞춘 인사다. 나랏일을 맡길 때는 그 사람의 자질과 능력 못지않게 국민의 정서와 이해 역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이 부분을 가장 거추장스럽게 생각한다. 국민을 위한 인사가 아니라 ‘대통령과 그의 권력’을 위한 인사일 뿐이다.

반대편 사람일지라도 능력과 자질이 충분하면 발탁하겠다는 지혜와 포용이 없다면 ‘잘된 인사’는 불가능하다. 박근혜 정부의 인사에서는 이런 면을 티끌만큼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니 나라가 이 모양인 것이다. 갈등의 골은 깊어지고 불만은 커지고, 화해와 포용은 찾아볼 수 없다.

반면 세종대왕은 인사로 태평성세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의 선왕 태종 때다. 충녕대군으로 불리던 세종은 세자도 아닌 왕자들 중 하나였다. 자유분방한 성품 때문에 잦은 문제를 일으켰던 세자 양녕의 행실은 태종의 호통에도 개선되지 않았다. 덕목과 규범을 강조하던 대신들과 유학자들 눈에 세자 양녕은 우려의 대상이었다. 왕세자가 마땅히 지켜야 할 예의법도조차 무시한다는 비난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세자 책봉 끝까지 반대했던 황희 포용한 세종

양녕이라고 아버지 태종의 눈치를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태종이 외척 제거를 목적으로 민 씨 형제를 죽이려 하자 양녕의 외삼촌들이 그를 찾아온다. 억울함을 하소연했지만 양녕은 외삼촌의 부탁에 호통을 치며 거절한다. 어릴 때 외가에서 자라 외삼촌들과 각별한 사이였는데도 부왕 태종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그리 한 것이다.




결국 양녕은 세자에 책봉된 지 14년 만인 1418년 대신들의 상소에 의해 세자에서 폐위된다. 극소수만이 세자 폐위 상소에 반대했다. 가장 강하게 반대했던 인물은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쳤던 이조판서 황희였다. 태종에게 ‘국본을 쉽게 바꾸는 건 옳지 않다’며 반대하다가 결국 경기도 파주로 유배를 가게 된다. 황희의 반대가 얼마나 거셌던지 태종은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세우면서 황희를 가장 경계했다. 세종에게 양위할 때 태종은 황희의 유배지가 도성과 너무 가깝다며 전라도 남원으로 유배지를 옮기라고 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종은 황희를 밀쳐내지 않고 그의 자질과 능력을 높이 샀다. 용서에 그치지 않고 복직까지 시켰다. 상왕 태종의 황희에 대한 분노가 풀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튼 자신의 세자 책봉을 끝내 반대하다가 귀양까지 갔던 사람을 다시 불러 최측근 요직에 앉힌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다.



인사로 태평성세 이룬 세종, 인사로 무너지는 박근혜

황희는 이런 세종에게 보답한다. 왕과 대신들 사이에서 마찰을 최소화하고 세종의 이상이 하나씩 빛을 보는 데 앞장섰다. 때론 허물 때문에 문책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세종 치적 18년간 영의정을 수행하며 태평성세를 이루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황희에 대한 세종의 안목도 적중했다. 최고의 벼슬 자리에 그 누구보다도 오래 머물렀던 재상이었지만 황희에게는 돈도 자신의 세력도 없었다. 국민들은 청렴한 재상 황희와 이런 재상을 발탁한 지도자를 존경했다.

세종이 이룩한 태평성세의 비결 중 하나가 ‘백성과도 소통할 수 있는 지혜로운 인사’였다. 자신과 대척점에 서있던 이전 정권의 사람 황희를 중용할 정도의 혜안과 결단이 세종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런 안목을 가진 지도자를 만나는 건 국민들에게 큰 행운이다.

박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황희 같은 사람을 중용하기는커녕 끝까지 적으로 돌리려 했을 것이다. 이것이 박 대통령이 태평성세를 이룰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다. 인사가 만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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