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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선언보다도 멋졌던 2.8독립선언

  • 입력 2015.02.08 20:40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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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를 보다 보면 메인 이벤트보다 오픈 게임이 더 박진감 넘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역사에서도 그렇다. 굵직한 족적을 남긴 대사건도 분명히 존재하고, 그 딸림처럼 묘사되는 자잘한 사건들이 그 주변에 늘어서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그 작은 사건이 가진 함의가 오히려 야무지게 빛날 때가 있는 것이다. 3.1운동이라는 민족적 항쟁의 서곡처럼 울려 퍼졌던 1919년 2월 8일의 2.8 독립선언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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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차 대전이 끝난 후 유포된 민족자결주의는 엄연히 승전국인 일본의 식민지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으나 그 뜻은 식민지로 전락한 지 10여 년에 울화통을 쌓아가던 청춘들의 가슴에 불을 당기기에 충분했다. 미워도 미워도 결국 신학문을 배울 곳은 일본 뿐이었기에 현해탄을 건너와 있던 유학생들은 특히 더했다.

원래 조선은 우리 나라였지 일본이 아니었지 않은가. 언제까지 우리가 일본놈들 하인 노릇을 해야 할 것인가. 1912년 조직된 유학생 학우회는 그야말로 반일 사상의 온상이었으며 조선인 유학생이라면 무조건 가입해야 했고 미가입시 바로 "일본놈 개"라는 호칭이 날아가는 무시무시한(?) 유니온샵이기도 했다.

유학생 학우회 기관지 '학지광'의 편집장이었던 최팔용은 일찍이 와세다 대학 동창회에서 이렇게 연설한 바 있었다. " 무릇 국가 또는 민족이 멸망한다 해도 반드시 영구히 망하는 것은 아니다. 또 국가, 민족이 융성한다 해도 또한 영구히 융성되는 것은 아니다. 보라! 멸망의 길을 걷던 폴란드는 지금 독립이 되고, 천하에 위엄을 자랑하던 러시아 제국은 지금 망하지 않았는가?” 듣고 있던 조선 유학생들의 가슴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그 연설은 더 이상 앉아서 뭉갤 수 없다는 청년들의 결기를 북돋운 신호탄이면서 무기력의 허공을 가르는 효시와도 같았다.


2.8 독립선언문


조선 유학생들은 1919년 1월 6일 (즉 고종황제가 죽기도 전에!) 동경 간다(神田)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회를 열어 "오늘의 정세는 우리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며...... 우리도 마땅히 구체적 운동을 개시하여야 한다."고 결의하고 실행위원으로 최팔용을 비롯한 10명을 선출한다.그런데 실행위원 중 전영택이 신병으로 사퇴하자 북경으로부터 서울을 거쳐 동경으로 온 이광수와 김철수가 추가되어 11명의 실행위원이 먼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한다. 독립선언서의 기초자는 조선이 낳은 3대 천재 중 하나라는 춘원 이광수 그 사람이었다.

1919년 2월 8일 일본의 수도 동경답지 않게 눈이 펑펑 내렸다. 조선 유학생들은 이날 2시에 열린다는 학우회 총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구구전승으로 알고 있었고 삼삼오오 행사장인 조선 YMCA 강당으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당연히 낌새를 챈 일본의 경찰들도 행사장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2시. 학우회장 백관수가 개회를 선언했을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최팔용이었다. "긴급동의가 있습니다!"를 부르짖으며 단상으로 올라간 최팔용은 모여 있던 조선 청년들의 피를 펄펄 끓게 만드는 선언문을 읽어내린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를 쟁취한 세계 모든 나라 앞에 독립을 성취할 것을 선언한다." 이미 일본 경찰들은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지만 조선 청년들의 결기를 누를 수 없었다. 선언문은 유려했으나 당당했다. 3.1운동 선언문이 명문장이라고는 하지만 도무지 그 명문을 떠받칠 힘을 찾을 수 없었던 것과는 달랐다.


2.8 독립선언서의 기초한 춘원 이광수

3,1 선언문에서처럼 "아아! 새 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도다. 힘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도다. 지난 온 세기에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의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도다." 하는 어설픈 영탄 대신 "우리 민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이로써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해 모든 자유행동을 취하면서 최후의 1인까지 자유를 위한 뜨거운 피를 뿌릴 것이니 이 어찌 동양평화의 화근이 아닐 것인가?"라는 명확한 경고가 있었고,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3.1 독립선언 공약 3장 중)는 어정쩡함 대신 "만일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한다면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포할 것이다."는 포효가 터져 나왔다.

하물며 최팔용이 목이 찢어져라 독립선언서를 외치던 장소는 3.1 선언에서처럼 무슨 고급 식당의 음습한 방이 아니라, 일본 동경 한복판 순사들 그득한 강당이었다. 조선 학생들은 귀로는 선언문을 들으며 몸으로는 악 쓰며 달려드는 형사들과 격투를 벌였다. 최팔용이 " (독립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시)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한 혈전을 선언한다.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에 대해 우리 민족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다."고 벽력같이 소리친 순간 10년 동안 참고 참았던 소리가 가슴을 찢고 그날 내린 눈처럼 동경을 뒤덮었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학생들은 모두 끌려갔다. 일본에 대한 혈전을 선언한 이 불령선인들에게 일본 검찰은 내란죄를 적용하려 들었다. 90여년 뒤의 남한 검찰도 장난으로 북한 사이트 글을 리트윗한 청년을 "국가보안법"으로 잡아들였으니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 불온분자들에게 내란죄는 어쩌면 응당한 죄목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 역사는 한 명의 양심과 마주하게 된다. 변호사 후세 다쓰지.

그 후 조선 독립운동사에서 큰 족적을 남긴 은인이자 선각자인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외쳤다. "학생들의 신분으로 자기 나라와 독립을 부르짖은 것이 어찌하여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된단 말인가 당치도 않다." 이 당연하지만 난감했던 논변 앞에 일본 법은 꼬리를 내린다. 그들은 내란죄를 적용하지 못했다. 형은 길지 않았지만 혹독했다. 주동자 중 하나였던 송계백이 젊디 젊은 나이로 옥사했을만큼. 그는 학생모자 안에 독립선언서를 숨겨 국내로 반입하여 2,8독립선언이 예정되어 있음을 국내에 전파했던 사람이었다.

1919년 2월 8일. 눈 내리는 동경에서 조선 독립 만세의 외침은 그렇게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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