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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복지부의 한심한 피임 포스터

  • 입력 2014.12.08 10:09
  • 수정 2014.12.08 17:32
  • 기자명 버락킴너의길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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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국민연금 공익광고 포스터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국민연금공단 공모전에서 최우수작으로 선정된 이 작품은 "65세 때 어느 손잡이를 잡으시렵니까?"라는 문구와 함께 위 아래로 폐지를 실은 손수레와 여행용 캐리어가 대비돼 있었다. 노후에 폐지를 줍는 빈곤층이 될 것인지 여유를 만끽하며 여행을 다니는 중산층이 될 것인지가 국민연금 가입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내용을 어필하는 것이었다.


논란이 된 국민연금공단의 홍보 포스터


포스터는 간단한 그림과 문구만으로 내용을 전달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면에선 국민연금공단의 이 포스터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스터에 담긴 노인을 비하하는 시선은 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세심한 배려가 부족했고,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이 포스터는 실패작이다.

최근 이와 같은 사례가 또다시 등장했다. 보건복지부가 제작하고 온라인에 게재한 피임 홍보 포스터다. 포스터에는 ‘다 맡기더라도 피임까진 맡기진 마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커플 한 쌍의 뒷모습이 담겨 있다. 남성은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쇼핑백을 두 손에 짊어 지고 어깨에는 여성의 숄더백을 메고 있다. 측은함마저 들 정도다. 반면 여성은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피임 홍보 포스터


이 포스터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불편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남성 입장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봉(?)인가?'라는 생각이 들 법하다. 가장 꼴불견이라고 생각한다는 '백셔틀'까지 하고 있는 모습이 썩 유쾌하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피임 면에서 남성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인식도 반가울 리 없다.

여성도 불쾌하긴 마찬가지다. 포스터에 나타난 여성의 이미지는 '의존적'이고 '이기적'이다. 자신의 짐을 남성에게 모두 맡기고 있는 모습은 여성의 입장에서도 마뜩잖을 것이다. 그것이 남녀의 성 역할에 대한 '고전적' 은유라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성평등을 지향하고 있는 사회적 흐름과도 걸맞지 않다.

이와 같은 논란은 포스터 왼쪽 하단에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피임은 셀프입니다. 피임은 남자 혹은 여자만의 의무가 아닙니다. 함께 신경 써야 할 소중한 약속입니다’라는 바람직한 문구를 무색하게 만든다. 보건복지부가 진심으로 피임이 함께 신경 써야 할 소중한 약속이라고 생각했다면, 남녀가 각자의 짐을 나눠 들고서 밝게 미소 짓는 앞모습을 담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보건복지부의 어처구니 없는 포스터에 대해 박봉정숙 여성민우회 상임대표는 "피임을 남녀 대립구도의 갈등 문제인 것처럼 선정적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복지부가 남자에게 모든 것을 떠맡기는 여성의 이미지를 포스터로 보여주는 것 또한 여성혐오의 시선을 재생산하는 듯해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수준의 포스터를 제작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SNS에 공개하는 보건복지부의 성 의식은 개탄스러울 지경이다. 비단 보건복지부만의 문제이겠는가. 얼마 전에 논란이 됐던 '성희롱엔 농담으로 대응하라'는 고용노동부의 괴상한 면접 요령은 공직 사회가 얼마나 왜곡된 성 의식에 갇혀 있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대수롭지 않게 스쳐갈 수 있는 한 편의 포스터이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그 안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참 많이 있다. 보건복지부의 다음 포스터는 '피임은 남자 혹은 여자만의 의무가 아니며 함께 신경 써야 할 소중한 약속'이라는 내용이 제대로 담겨 많은 시민들을 설득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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