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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1월 24일 위장결혼식과 마지막 신랑

  • 입력 2014.11.24 10:40
  • 수정 2014.11.24 13:44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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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악스럽게도 대한민국을 쥐고 흔들던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 '야수의 심경'이 된 중앙정보부장의 권총은 사정없이 유신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러나 유신의 주인은 죽었으되 아직 유신은 죽지 아니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자마자 발동된 비상계엄은 전국을 뒤덮고 있었고 고인이 아홉 번이나 내려 국민들의 머리를 옭아매려 들었던 긴급조치는 아직 그 시퍼런 살기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박정희도 죽었는데 우리가 그냥 숨죽이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또 한 번 체육관에서 대통령이 뽑히는 꼬락서니를 두고 볼 수는 없지 않겠는가 ." 하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민주청년협의회도 그 중 하나였다.

당시 당국의 허가를 받아 집회를 한다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내주고 온전하기를 바라는 격이었다. 그래서 머리를 짜낸 것이 결혼식이었다. 합법적으로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라면 결혼식과 장례식. 장례식이라면 누굴 생으로 죽여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으니 자연히 결혼식에 초점이 모아졌다. 그런데 결혼식도 누군가 결혼을 해야 열릴 수 있는 것 아닌가. 남자와 여자가 있어야 하고 그 가족이 있어야 하고 청첩장도 그 혼주의 이름으로 돌려야 그럴듯할 게 아닌가. 우선 신랑과 신부가 필요했다. 아니 둘 중의 하나라도 필요했다.

그때 나선 게 연세대 사학과 73학번 홍성엽이었다. 경향신문 신동호 편집위원에 따르면 그는 이렇게 말하며 신랑으로 자원했다고 한다.

“제가 희생할 때가 왔습니다.”




운동권이라기보다는 세파에 초탈한 도인에 오히려 가까운 성격이었다는 그는 이미 ‘희생’한 적이 있었다. 2학년 때 학교에 벽보를 붙이다 징역 5년을 선고받았던 것이다. 벽보 붙인다고 5년이다. 박통 1세의 폭압은 상상 이상이었다. '남이 안 하려는 일은 다 하겠다고 나서던'(최열 회고) 그가 다시 독사 눈 시퍼런 계엄 정국 첫 시위의, 그것도 가짜 신랑 역을 맡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그는 어머니께 “큰일을 하고 죽어야 하는데 동의해 주셔야겠습니다."며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묵인했고 아들의 가짜 결혼의 혼주가 된다. 어이 없어진 것은 홍성엽의 담당형사였다. ”아니 갑자기 결혼이라니. 대체 내가 모르는 걔 애인이 어디 있다고! 어머니 정말 결혼하는 겁니까?“ 하지만 그 아들에 그 어머니. 어머니는 경찰이 물을 때마다 단호하게 결혼은 사실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신랑은 그렇게 구색을 맞췄는데 신부는 가상 인물이었다. 민주화운동 단체 간부를 맡았고 그 이전에 세상을 뜬 윤형중 신부의 성씨를 빌렸고 이름은 ‘정민’이었다. 당시 18년간 '군정'의 통치를 받은 이들의 꿈인 '민정(民政)'을 살짝 비튼 이름. 신랑 홍성엽군과 신부 윤정민양의 결혼식 날짜는 1979년 11월 24일로 정해졌다.

대회장은 함석헌 옹이었고 주례는 전 공화당 의원이자 이제는 재야인사가 된 박종태가 맡았다. 전 대통령 윤보선도 하객이었고 똥물 사건으로 유명한 동일방직 노동자들과 원풍모방 노동자들도 초대를 받았다. 양복을 근사하게 걸치고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여든 학생들도 많았다. 신랑이 기운차게 입장했다. 그런데 그 순간 축혼행진곡 대신 민주 회복을 위한 선언문이 우렁차게 낭송됐고 유인물이 식장에 눈발처럼 휘날렸다. 만세 소리와 함성 소리가 잠깐 장내에 그득했지만 바로 그 결기는 난폭한 굉음에 스러지고 만다. 윤보선과 함석헌을 미행하던 경찰들이 낌새를 알아차리고 의자를 내던지며 결혼식을 쑥밭으로 만든 것이다. 계엄 시대였으니 계엄군도 합세했다.

“그동안 폭력적인 경찰로부터 수없이 당해봤지만 그날의 상황은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 이총각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날은 많은 사람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백기완은 보안사에 끌려가 정신착란을 일으킬 정도의 고문을 받고 까무라친다. 윤보선은 불구속이 됐지만 이 날 이후 신군부의 회유에 넘어가 나이 여든에 전두환의 똘마니 노릇을 하는 주책을 부리게 된다. 이 사건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실상 방조하여 집회를 성사시킨 후 때려잡았다는 설까지 있는 신군부의 보안사는 악마처럼 사람들의 손톱을 뽑고 콧구멍에 고춧가루물을 붓고 전기로 지졌고 몽둥이로 찜질을 한 뒤 ‘내란음모죄’(이 죄목 어디서 많이 들었다)로 엮어 감옥에 넣어 버렸다.

신랑 홍성엽이야 말할 것이 없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 받은 고통의 다섯 배는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이 고문 때문에 그는 이후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역시 걸물이었다. 경향신문 신동호 편집위원에 따르면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하며 신군부의 따귀를 때린다. “폭행당한 내용을 전부 말하는 것은 군의 체면을 위해 그만두기로 하겠다.” 세상에 이렇게 말 한마디로 상대방의 면상에 흙탕물을 끼얹을 수 있다니.

신동호 편집위원에 따르면 그는 계속 운동을 하다가 1987년 백기완 민중후보 선거본부 일을 끝으로 운동권과 절연했다고 한다.

“국선도·천도교 등 종교적·도인적 삶에 심취했다. 그와 민청협 활동 등을 같이 했던 문국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에 따르면 도인으로서 그는 손을 대지 않고 다른 사람을 진맥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중략)··· 홍씨가 운동권과 절연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중략)··· 그가 운동권과 결별한 1988년은 직선제 헌법에 의해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해였다. 비록 가짜 신부이긴 하지만 자신의 반려자인 윤정민, 즉 민정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진정 자신이 살고 싶던 삶으로 복귀함으로써 상상의 신부인 민주주의와 달콤한 결혼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까.”

도인으로의 삶을 살던 그에게 백혈병이 찾아왔고 그는 오랜 투병 끝에 2005년 사망했다. 위장결혼식 이후 그는 진짜 신부를 맞이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참으로 후덕하고 듬직하게 생긴 한 청년은 그 결혼식의 ‘정민’, 즉 민정을 위해 수절했던 것일까. '남이 안 하려는 일이면 항상 나서서 하고' 어머니를 설득해 자신의 죽을 자리를 마련했던 젊은이는 쉰 셋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35년 전, 오지 않을 신부에 앞서 성큼성큼 주례 앞으로 나아가던 한 ‘신랑’의 명복을 빈다. 그가 원하던 민주주의라는 신부는 오늘날에조차 아직 화장을 마치지 못했음에 미안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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