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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의 대장정

  • 입력 2016.09.10 16:02
  • 수정 2016.11.15 15:24
  • 기자명 우에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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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0월 16일, 중국 남동부의 장시성은 아름다운 달빛을 즐길 수 있었다.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제1전선군Chinese Communist First Front Army의 남녀 86,859명은 그 달빛을 즐길 수 없었다. 달빛은 무방비 상태로 그들의 모습을 드러내주었다. 머리 위에 나무가지로 얽은 위장막을 들고, 그들은 서쪽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1전선군의 길게 늘어진 대열은 100km 넘게 들어졌고 본거기에서 머무는 동안 모아두었던 보급품을 운반하느라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X레이 기계부터 인쇄기계까지 모든 것을 짊어졌는데 얼마 안가서 모두 버릴 물건들이었다. 그들이 20개월 후에 역사적인 9,600km의 행군을 끝냈을 때에는 겨우 4,000명만 남았다. 그렇지만 마오(엄청난 독서와 지식욕을 자랑하던)는 20개월의 악전고투에서 전사와 정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행군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는 최고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는 정치배경때문에 의사결정과정에서 밀려나 있었다. 대신에 러시국제공산당Comintern이 파견한 독일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이 큰 목소리를 냈다. 그는 보구(博古 사진참조, 본명은 친방셴(秦邦宪))와 지휘권을 나눠가졌다. 보구는 브라운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친방셴

급격히 힘을 잃어가던 중국 공산당은 2가지 의문부터 해결해야 했다. 먼저 중국혁명이 러시아 모델을 그대로 따를 것인지를 두고 혼선이 있었다. 러시아 공산혁명은 도시의 프롤레타리아(재산이 없는 하위계층)의 봉기로 시작되었는데, 이미 1925년에 상하이에서 봉기를 했다가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군(KMT, 국민혁명군 또는 국부군)에게 진압되며 실패한 적이 있었다. 이 모델을 계속 따른 다면 러시아의 요셉 스탈린 그리고 브라운의 지원을 계속 받아야 했다. 그리고 전력이 열세인 적군이 특정 지역을 기지로 삼고 국민당군을 상대로 정규전을 벌일 수 있는 지도 결정해야 했다.

중국 공산당은 농촌지역인 장시성에 본거지를 마련했었다. 개발되지 않은 장시성은 도로가 거의 없었고 수 천 년 동안 사용하던 작은 도로나 오솔길로 외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장개석은 히틀러가 파견한 군사고문 한스 폰 젝트(사진 참조)의 조언에 따라 암석과 콘크리트로 된 검문소를 연결해서 지어나갔다.

히틀러가 파견한 군사고문 한스 폰 젝트

독일 등에서 군사원조를 받고 주요 도시지역을 장악하던 국민당군이 공산당을 진압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중국본토에서 패전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하면, 국민당 총통 장제스가 제1차국공합작으로 베이지의 군벌을 토벌하고 중국의 중앙정부가 됩니다만 아래 지도와 같이 그의 영향권(파란색)은 대도시에 한정되었고 나머지 주요 지역은 지방군벌(분홍색)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장제스 총통을 납치해서 제2차국공합작으로 대일공동전선을 강요한 시안사건(1936년)이 생길 정도로 지방군벌의 힘은 컸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이 전복과 중화민국이 수립되고 1949년에 중국내전이 끝날 때까지의 온갖 사건과 일화는 너무나도 복잡하기 때문에 다른 기회에 보다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독일로부터 군사훈련과 장비를 지원받거나 구입했기 때문에 아래 그림과 사진처럼 흡사 독일의 외국인 부대를 방불케합니다.


결국 14,000개의 작은 요새가 건설되었다(영국이 남아프리카 보어의 게릴라전에 대항해 사용했던 초강경책을 차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솔길에 검문소를 설치해서 통행을 감시했고 그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지점에 또 하나의 검문소를 설치했다. 무자비한 포위가 시작되자 장시성은 완전히 고립되었고 공산당의 본거지는 서서히 압박을 받았다.

브라운은 당시의 정공법을 그대로 따라 자신도 검문소를 설치하고 단 한 뼘의 땅도 내주지 말라는 말도 안되는 지시를 내렸다. 결과는 당연히 참담했다. 제5차 포위작전 동안 홍군은 60,000명을 잃은 반면에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생각과 행동에서 남달랐던 마오는 이 작전에서 많은 것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새 전술을 도입했다. 적을 기습공격한 후에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바로 사라졌고, 국민당군을 작은 단위로 깊숙이 유인한 후에 매복공격으로 전멸시켰다. 가능한 한 정규전은 피했다. 소모전 속에서 일어난 마오의 1927년 가을추수봉기(그림참조) 후에 1,000명의 병력이 남았고 그는 장강 산맥 깊숙이 후퇴했다.


마오의 전술은 마르크스주의 원칙과 여러 면에서 충돌했고,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는 총과 칼에 의지하는 산적두목취급을 받았다. 1년 동안 적군을 이끌면서 참패만 거듭했던 브라운은 마오의 전술을 혐오하며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성공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홍군이 그대로 계속 가다가는 결국 전멸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장시성과 폰 젝트의 포위망에서 탈출해야 했다.

이후 몇 개월 동안, 힘들게 짊어지고 다니던 물건 중에 당장 필요하지 않은 것은 버리기 시작했다. 특히 강을 건너야 할 때에는 아낌없이 두고 갔다. 홍군이 하루에 30km를 행군하다가 나중에는 하루에 70km도 행군할 수 있게 되었다. 마오의 전술은 갈수록 가치를 더했고 마오가 중요한 의사결정자가 된 반면에 브라운은 관측통 정도로 밀려났다.

홍군은 서쪽으로 이동하다가 북쪽으로 향하면서 거대한 C자 형태를 그렸다(지도 참조). 대장정은 고난과 위험, 인간생존의 승리, 연이은 전투를 거치면 간발의 차이로 전멸을 모면했다. 대장정을 통해, 마오는 적을 계속 교란시키며 전략전술의 천재로 태어났다. 그의 군대는 전광석화처럼 국민당군 배후를 공격했다가는 숲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장정은 알렉산드로스의 원정이나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과 유사한 면이 있다. 어쨌든 행군을 마치기 전에 일어난 2개의 사건으로 대장정은 가장 극적인 원정의 상징이 되었다.


다두강은 북서쪽 멀리 칭하이(青海)성의 히말라야 산맥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와 갑자기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흐른다. 다두강은 절벽 사이를 급하게 흐르며 1935년 당시에는 루딩교(瀘定橋)를 걸어서 건너야 했다. 원래 마오는 이 지점이 아니라 훨씬 남쪽의 안슌창이라는 마을에서 조각배를 타고 북쪽 강변으로 건널 생각이었다. 1935년 5월 24일, 적군은 몇 백 명이 전부인 이 마을에 도착했고 빗물에 젖은 진흙길을 미끄러져 내려가 마을을 점령했다. 그런데 겨우 한 척의 배밖에 없었고 17명의 지원자를 뽑아 강건너로 보내 2척의 배를 더 찾아냈다. 전체 병력을 옮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마오는 24시간 내내 병력을 실어 나르는 한편, 지휘관과 작전회의를 열었다.

그답게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어려운 방법을 선택했다. 제4 강습연대Shock Regiment는 길이 없는 다두 강변을 140km 거슬러 올라가 루딩교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절벽을 따라 구불구불 오르내려야 했고 서쪽 멀리에는 해발 600m의 산맥을 넘어야 했다. 마오는 그들에게 3일의 시간을 주었다. 국민당군이 알아차리기 전에 다리를 점령하지 못하면 홍군은 전멸할 위기였다.

연대는 5월 27일 자정에 출발했다. 길이 없었기 때문에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디디며 뒤를 따랐고 강 위에 솟은 수 백 미터의 절벽에 매달렸다. 강폭이 좁은 지역에서는 반대편 강변에서 그들을 쉽게 볼 수 있었고 적이 총을 쏘기도 했다. 20km 지점에서 100명의 국민당군과 만나 격퇴했지만 달아나던 적이 개울의 나무다리를 폭파하는 바람에 나무를 베어 임시 다리를 놓아야 했다.

국민당군 제24사단이 참호를 파고 길목을 차단했다. 연대장 양은 부근의 산으로 작은 선봉대를 보내 배후에서 적을 공격해 몰아냈다. 강습연대는 하루 만에 산맥지대에서 2번의 전투를 벌이고도 35km를 전진했다. 그리고 몇 시간의 휴식을 가졌다.


당시 지리멸렬했던 홍군이 이런 모습일 리가 없죠. 중국의 선전화입니다. 아래 사진도 좀 나은 편이기는 합니다만.


오전 5시에 다시 행군을 시작하자 급한 전령이 도착했다. 하루를 앞당겨 29일에 다리를 점령하라는 명령이었다. 단 하루 만에 100km를 주파하고 다리까지 점령해야 했다. 연대장은 담담히 "명령을 받았으니까"라며 산 정상에 올라 참호 속에 틀어박힌 국민당군을 수류탄으로 몰아내고는 15km를 달려 내려갔다.

오후 6시, 앞으로도 50km를 더 가야했다. 안개와 이슬비로 길을 미끄러웠지만 다행히 적도 사라졌다. 이들은 생쌀을 씹으며 어둠 속에서 계속 전진했다. 저녁 11시, 좁은 강폭 너머로 어렴풋한 불빛이 보였다. 국민당군 대대가 루딩교를 수비하러 다가오고 있었다. 연대장은 포로에게서 입수한 국민당군 암구호와 신호를 이용해서 자신들도 홍군을 추격하는 아군이라고 속였다. 반대편에서도 같은 화답이 왔고 두 부대는 반대편 강변을 나란히 전진했다. 15km를 가던 중에 국민당군은 노숙을 위해 멈췄지만 연대는 계속 전진했다.

구름이 걷혔지만 여전히 어두웠다. 연대는 강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서로를 묶었다. 너무 지친 병사들은 무기와 화약만 소지하고 나머지는 모두 버렸다. 동이 트자 연대는 손에 총을 들고 뛰기 시작했다. 새벽이 되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쌍안경으로 루딩 마을을 볼 수 있었다. 강 양쪽에 파고다 지붕의 다리 연결소가 있었고 13개의 쇠사슬이 113m의 강폭을 연결하고 있었다. 쇠사슬은 크고 굵었으며 손으로 직접 녹여 만드는 것이었다.


300년 전에 만든 루딩교입니다. 이런 굵은 쇠사슬 위에 나무판자를 놓고 다리를 건넜습니다. 300년 전에 만들었는데도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고 해서 신비로운 중국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계신데... 이런 식으로 판자를 모두 걷어내고 계속 유지보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끊어지는 일도 여러 차례있었고 그 때마다 대공사를 벌여야 했습니다.

다리를 자세히 살펴보던 연대장은 기겁했다. 국민당군이 다리 위의 판자를 제거했기 때문이다. 약 2/3 정도는 마치 대형 해먹처럼 쇠사슬만 위험하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용이 사람을 집어 삼키려고 하는 것처럼 물살이 거칠게 흘러갔다. 이제 9개의 쇠사슬을 기어서 건너가야 했다. 연대는 우선 이쪽 강변을 지키고 있던 국민당군을 소탕했다. 카톨릭 교회에 숨어 적의 동태를 살펴보니 생각보다 적의 숫자가 많았다. 수 백 명이 지키고 있는 다리를, 그것도 쇠사슬 위를 기어서 건너가야 했다. 그렇지만 망설일수록 적의 병력은 불어났기 때문에 불가능한 임무를 완수하기로 했다.

먼저 밥부터 짓고 굶주린 배부터 채웠다. 그런데 국민당군이 낌새를 알아채고 박격포를 쏘기 시작했다. 오후 4시, 다리 뒤에 설치해 놓은 중기관총과 소화기로 엄호사격을 퍼부으며 돌격명령이 떨어졌다. 제2 중대의 22명이 앞으로 달려가 흔들거리는 쇠사실 위에 올라탔다. 국민당군은 완전히 노출된 이들에게 사격을 해댔다. 제3 중대도 뒤를 따르며 널판지를 깔아 더 많은 병력이 전진할 수 있게 했다. 엄호사격 아래에서 22명은 공포와 피로를 이기며 침착하게 전진했다.

국민당군은 반대편 연결소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이제 무조건 돌파하는 수 밖에 없었다. 2중대원은 계속 기어갔고 총을 맞은 병사는 강물 아래로 사라졌다. 살아남아 다리를 건넌 병사들이 기관단총과 칼을 휘두르며 연결소로 뛰어들었지만 이미 국민당군은 도망을 친 후였다. 2시간의 소탕전 끝에 연대는 루딩교를 완전히 확보했다. 놀랍게도 22명의 선봉대 중에 18명이 살아남았고 상처 하나 없었다. 국민당군의 탄약이 물에 젖어 멀리 나가지 않은 덕분이었다.


며칠 후에 도착한 마오는 다시 한 번 죽음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었다. 마오는 큰 공을 세운 연대에게 새 옷, 노트, 에나멜 펜과 분필을 상으로 주었고 병사들은 훈장보다 더 귀하게 여겼다. 홍군 제4 전선군과 만나야 했지만 위치를 알 방법이 없었다. 암호책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무선교신은 금지되었다. 만약 국민당군의 손에 들어갔다면 두 부대의 위치를 일부러 알려주는 꼴이 된다.

이제 3가지 진로가 남았다. 먼저 잘 알려진 서쪽 멀리의 카라반 경로. 너무 먼데다가 한족에게 적대적인 티벳인의 지역이었다. 그 다음은 동쪽으로 선회하는 경로인데 국민당군을 만날 위험이 컸다. 마지막은 대설산(중국발음을 몰라서... Great Snowy Mountain)을 가로지르는 경로였다. 해발 4,000m가 넘는 산을 올라야 했고 지역민이나 아는 작은 등산로를 이용해야 했다.


8개월 전에 함께 출발했던 86,000명 중에 이제 12,000명 정도가 남았다. 지도에서는 9,000km이지만 실제로는 2배 이상의 거리였다. 직선으로 나갈 수 없는데다가 부상병과 병자를 들것으로 날라야 했다. 적은 없지만 이제 눈덮인 거대한 산을 통과해야 했다. 마오는 반사되는 강한 빛때문에 시력을 잃지 않도록 머리를 천으로 두르게 했다. 그리고 홍군 대부분은 열대지역 출신이라 눈과 추위에 무기력했기 때문에 소지한 옷을 전부 입게 했다.

대설산은 미국의 록키산맥보다도 더 험난한 산이다. 얼마 되지 않아 산에는 흰색 하나만 보였고 길이 사라졌다. 마오는 선봉대를 보내 길을 찾게 했지만 해발 4,000m의 산소부족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속출했다. 최대한 큰 숨을 쉬며 한 발씩 내딛게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쓰러지고 떨어진 동료를 구하거나 일으켜 세울 체력도 남지 않았다.

선봉대가 길을 찾아냈고 다행히 그곳은 산소가 좀 더 풍부했다. 기력이 남은 사람들이 부상자나 비틀거리는 사람을 도우러 다시 내려왔다. 그렇지만 대부분이 이미 죽은 상태였고 그대로 둘 수 밖에 없었다. 정상에 오른 홍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친 사람들이 미끄럼을 타기 시작했고 눈에 대해 잘 모르는 지휘관은 그 모습을 보고 미끄럼으로 내려가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눈에 덮힌 암벽에 부딪치거나 절벽에 빠져 죽는 사람이 속출했고 중간에 멈추려고 해도 맨손으로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들이 일으킨 눈보라가 눈사태로 번졌다.

1936년 6월 11일, 제1 전선군의 생존자가 다웨이 마을에 들어섰고 제4 전선군의 정찰대와 만났다. 홍군은 살아남았다. 제4 전선군의 장궈타오는 마오를 만나 축하하며 1,000명의 병력을 지원했다, 제4 전선군은 80,000명의 병력이 있었고 제1 전선군과 비교도 안되는 비교적 쉬운 행군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화기애애한 표면 아래에서는 긴장이 감돌았고 두 지도자는 심상치 않은 여운을 남기며 헤어졌다. 장궈타이는 서쪽 경로를 선택했고 중국 북서쪽에서 1937년 3월 14일, 국민당측 중앙아시아 무슬림 군벌에게 참패를 당하고 4월 6일에 지휘관에서 물러났다.(장궈타이는 마오의 사천성 본거지 주장을 거부하고 북쪽 산시성을 주장했습니다. 마오와 격렬한 대립을 벌였는데, 마오는 장궈타이의 부하가 배반한 덕분에 숙청을 미리 알아채고 피신해 다시 한 번 목숨을 건졌습니다. 장궈타이는 무슬림 군벌에게 전멸당하고 겨우 500명의 홍군을 데리고 옌안에 피신해서 마오의 처벌을 오히려 걱정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결국 국민당에게 투항했다가 중국이 공산화되자 북미로 탈출했습니다.)

마오는 마침내 옌안에 들어섰고 그 후 10년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가 베이징에 입성하기 까지 아직도 많은 시간이 걸리지만 대장정은 이미 중국의 전설이 되었다. 그는 지리멸렬한 민병을 정예병으로 만들었고 자신의 전략전술로 전투를 벌이는 위치가 되었다.

대장정을 끝낸 뒤 4,000명의 생존자에게 연설하고 있는 마오쩌둥

루딩교 전투가 장정의 결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많은 선전에 이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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