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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그렇게 죽으면 안되는 아이였단다'

  • 입력 2014.11.05 10:05
  • 수정 2014.11.05 10:14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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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안오시는 거예요 급해요. 와 보시면 얼마나 급한지 아실 거예요. 빨리 와 주세요.”

이른 점심을 먹고 올라와 빈 사무실을 독차지하고설랑 간만의 여유를 만끽하는 차에 걸려온 전화였다. 아니 사실 밥 먹으러 간 줄 알았던 상사가 저쪽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전화 좀 받아라 임마 호령을 하기 전까지는 전화가 온 줄도 몰랐다. “전화가 5분 동안 계속 걸려 오면 미안해서라도 받아야 될 거 아니냐. 아무리 점심시간이지만.”
 
5분 내내 끊이지 않고 지치지도 않고 버튼을 눌러댄 수화기 저편의 아주머니의 말투는 다급했다. “제보를 했는데 왜 안 오시는 거예요.” 음절 하나 하나에 원망스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아주머니의 말인즉슨 30대 아들과 단둘이 사는 약간의 지적장애가 있는 할머니가 계신데 무슨 병인지 할머니의 다리가 썩어들어가고 있는데도 아들은 그를 방치한 채 허송세월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늘은 아예 아들이 문을 잠가 버리고 외출을 해 버렸다 했다. 대학도 나오고 반반한 직장에도 다녔던 아들은 실직한 후 놀고 있는데 자포자기한 듯 보인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수급자는 아니겠군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할머니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를 물었다.

“다리가 썩는 냄새가 집에 등천을 해요. 내가 노인보호인가 뭔가 하는 단체에도 전화를 해서 담당자가 왔었어요. 그런데 아들이 내가 이번 달 내에 해결을 하겠다 해서 그냥 돌아갔어요. 근데 그 아들 해결할 사람 아니에요. 완전히 자포자기해가지고..... 어제 내가 아들 없는 틈을 타서 할머니를 만났는데 할머니가 나더러 치료받게 해달라고 울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태가 만만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이템 헌팅 중인 PD를 찾았더니 통영이다 동해다 까마득히들 가 있다. 내가 직접 가자니 수삼일 정도는 다른 일에 얽매여 꼼짝을 못한다. 일단 되는 대로 찾아뵙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번 달 내에 해결하기로 했다고 하는데 월말이 코앞이니 아들이 병원에 모실 궁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싶었다. 한 번 가 봐서 정말로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이웃의 도움을 받아 집에 들어가 할머니의 의사를 확인하고 그 상태의 심각성을 두루 관찰한 후 전문가들로부터 노인 문제의 심각성을 경청하고 아들의 방임임을 명확히 하고서, 아들을 대면하여 책임을 묻고, 할머니를 병원으로 옮기면 한 아이템이 마무리 되는 것이다.

며칠 뒤 출동 준비 완료를 한 후 조연출에게 제보자와 약속을 잡아 보라고 얘기하고설랑 며칠 전의 점심 시간처럼 한껏 느긋하게 책상을 장악하고 있는데 얼뜬 표정의 조연출이 말을 더듬으며 다가섰다.

“선배님. 주.... 죽었답니다.”

“뭐야? 할머니가 돌아가셨단 말이야?”

몇 초 안되는 시간 머리 속은 부산해졌다. 아뿔싸 소식 듣자마자 그냥 가 볼걸. 제보자도 그렇지 죽을 정도로 심각했으면 경찰에라도 신고해 주지. 아이고 이거 왜 내가 죽인 거 같냐.,..... 생각의 총알들이 종횡으로 대뇌피질 벽을 부딪치는데 또 다른 포성이 귀청을 울렸다.

“아니요. 아들이 죽었답니다. 자살했답니다.”  

지적장애인 어머니와 그와 비슷한 여동생 하나 두고 있었다는 30대 남자. 결혼도 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던 그는 어느 중견 기업에서 해고되었다고 했다. 그 기업의 이름은 번듯했지만 구조조정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짤렸다는 표현을 하는 걸로 봐서는 비정규직 아니면 임시직이었던 것 같다.



새벽에 나가 밤중에 들어오는, 부족한 어머니 모시고 사는 보통의 노총각이었던 그는 해고 후 세상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단칸방 살림과 쥐뿔 위의 터럭보다 조금 나은 형편, 그리고 건강하지도 못한 지적장애의 어머니, 그리고 도움 안되는 기타 가족들을 어깨에 짊어지고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을 옮기던 그에게 해고가 어떤 의미였을지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썩어 들어가는 어머니의 다리에서 배어나는 역한 내를 맡으면서, 발을 동동 구르는 이웃의 채근을 멍한 표정으로 들어주다가 이번 달 내에 어떻게든 해결을 하겠다고 힘없이 대꾸하던 청년은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그의 짐을 부려 버리고 세상과 이별했다.

어떻게 죽었을까. 어머니의 신음을 들으며 옆방에서 목을 맸을까. 제보가 올 당시 어머니를 집에 혼자 두고 나갔다던데 어느 한강다리 아래로 몸을 던진 것일까. 그가 마지막 본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사람이 죽을 때에는 주마등처럼 과거가 스쳐 지난다는데 그 주마등 가운데 설핏 웃어 볼 수 있는 그림이 얼마나 되었을까.

세상에 태어나 서른 몇 해를 고통스레 살아냈을 한 우주가 내 귓전에서 잉잉거리다가 먼발치에서 사라져 갔다. 우리 주위에는 얼마나 많은 우주들이 지친 숨을 몰아쉬며 사위어 가고 있을까. 조금만 더 빨리 소식이 왔어도 내가 간발만 서둘렀어도 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한 목숨에게 쓸쓸한 조의를 표한다. 나는 그를 모른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안다.

이 청년은 신문에도 나오지 못했다. 비슷한 죽음은 많았다. 10년쯤 전에는 생활고를 못이긴 세 아이의 엄마가 아이 모두를 아파트 옥상에서 집어던지고 자신도 떨어져 죽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올라갈 때 만난 이웃도 있었다. 아이들은 울부짖었지만 이웃은 그저 엄마가 아이들을 혼내려나보다 하고 지나쳤다고 한다. 하기야 누가 상상하랴. 애 셋의 엄마가 애들을 제 손으로 수십 길 높이에서 떨어뜨리라고는.



그때 아이들은 살고 싶어했고 살려 달라고 울었지만 오늘 소식이 들린 여중생은 '기쁘게' 죽음을 택한다고 적었다. 말썽 한 번 부린 적 없고 밝았다는 중학생 아이가 기쁘게 죽겠다니 도대체 그의 삶은 얼마나 견디기 싫을만큼 무서웠기에. 지겨웠기에. 팍팍했기에.

새삼스레 놀랄 필요는 없다. 빈약한 내 기억 속에만 해도 이런 류의 사건은 수십 건이다. 슬퍼해도 며칠 뒤면 잊힌다. 유사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또 가슴을 치지만 곧 리모콘을 두드리고 카드를 긁는다. 앞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남기고 죽어간 청년의 자살 소식에 망연한지 10분 뒤 나는 다른 아이템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그 슬픔과 망각의 반복이 부질없고 의미없다 해도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슬퍼하기를 잊지는 말자. 가슴 아파하는 일조차 게으르지는 말자. 기쁘게 죽어간 아이야. 너는 그렇게 죽으면 안되는 아이였단다.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영원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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