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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11월 4일 마지막 의병장의 죽음

  • 입력 2014.11.04 16:11
  • 수정 2014.11.04 16:27
  • 기자명 김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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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의병 당시 의병들의 모습

독립기념관에 갔다 왔다. 특별히 가려고 해서 간 건 아니고 나들이갈 곳도 마땅치 않은 차에 딸아이가 요즘 학교에서 독립운동 단원을 배우고 있다 하는 소리에 겸사겸사 천안행으로 길을 잡았다. 오랜만에 온 기념관은 전혀 새로운 모습이었다, 내가 언제 여길 와 봤더라 기억을 더듬는 사이에 커다란 글자들이 채워진 벽 앞을 지났다. 그 벽의 글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라는 망해도 의병은 죽지 않는다.”

이 말은 적어도 1915년 11월 4일까지는 유효했다. 이날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 장군이 사형당했으니까. 그는 1907년 정미 의병, 즉 군대 해산 이후 일어난 의병대에 가담했고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등 조선 이북 4도의 산악 지대를 호랑이처럼 넘나들며 남에서 번쩍 북에서 번쩍 일본군을 골탕먹였던 의병장이었다. 그의 체포와 처형 이후 국내에서의 의병 활동은 거의 종말을 고한다.

그는 평안도 성천 출신의 가난한 농민이었다. 대한제국 군인이었다는 설도 있으나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따르면 그는 “기운이 남보다 건장하여 무뢰한의 두목이 되었고.... 빈민을 이용하여 부자를 협박하는 등 폭행이 무수한 자”였다. 즉 바꾸어 말하면 그 용력이 출중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지주나 부자들의 부당한 일을 보면 참지 못하고 소작농들을 조직하여 부자들의 멱살을 잡아 흔들거나 때로는 패대기도 질 줄 알았던 사내 중이 사내였다는 얘기가 된다. 고향을 떠나 황해도 곡산 쪽으로 이사해서 화전을 부쳐먹어야 했지만 그 의협심과 용기가 어디 가겠는가.

조선 마지막 의병장 채응언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다. 즉 일본이 한국이라는 생선을 단숨에 집어삼키기 위한 마지막 가시를 제거한 것이다. 그래봐야 친위대 진위대 다 합쳐 수천 명의 병력이었지만 일본은 한 치의 껄끄러움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순종 황제의 해산 조칙은 서글펐다. “짐이 생각하건대 국사가 다난한 때를 만났으므로 쓸데없는 비용을 절약하여 이용후생의 일에 응용함이 오늘의 급선무다.... 너희들 장수와 군졸의 오랜 노고를 생각하여 계급에 따라 은금을 나누어 주니 너희들은 짐의 뜻을 받들어 각기 업무에 허물이 없도록 하라.”

이것은 황제 폐하의 명령이 아니라 역적들이 위조한 것이라고 절규하던 1·대대장 박승환이 권총으로 자결하자 한국군 친위대 병사들은 무기고로 달려가 일본군에게 저항한다. 1907년 8월 2일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에서 벌어진 일대 격전은 대한제국을 무골충 쯤으로 치부하던 일본과 서울 주재 외국인들을 놀라게 할 만큼 치열했다. 그리고 이 반란은 지방의 진위대로 번졌고 현역 군인이 가세한 의병들은 한층 더 우수한 전투력으로 일본과 맞서게 된다. 힘 세고 용감한 농민 채응언도 그 일원이 됐다.

“을사5적과 정미7적같은 역신들의 살점을 2천만 동포가 씹어먹으리라.”고 격문에서 분노를 터뜨리던 채응언은 다른 의병집단이 일본군에 격파되거나 만주로 이동하는 동안 내내, 그리고 끝내 나라가 없어지고 일본의 일부가 된 나라에서 장장 7년 동안 일본군을 괴롭힌다. 황해도 수안의 헌병 주재소가 습격당하는가 하면 함경남도 안변의 주재소가 털렸고 황해도 동쪽을 두들긴 의병대가 강원도 북쪽에 불쑥 나타나 일본군을 어지럽게 했다. 수십 명의 목숨을 잃은 일본군 역시 독이 올랐다.

또 “일진회원을 보고 죽이지 않는 자는 참한다.”는 것이 채응언 의병대의 군령이었으니만큼 친일파들 또한 채응언 의병대장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280원을 내걸고 채응언을 잡고자 했다. 결국 채응언은 군자금을 얻으러 가다가 현상금에 탐난 동포의 밀고로 체포된다. 하필이면 그의 고향 평안도 성천에서였다. 체포되는 와중에 격투가 벌어져 채응언과 파출소장 다나까 모두 부상을 입었는데 우리가 채응언의 모습으로 기억하는 사진은 바로 붕대를 칭칭 감은 다나까가 마치 맹수를 포획한 듯 쇠사슬로 묶어 놓은 채응언의 모습이 담겨 있다.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장장 7년 동안 일본군을 괴롭힌 채응언 의병장

그는 재판 과정에서 줄곧 태연했고 법정에서도 태연자약했다고 전한다. 그는 당연히 사형 선고를 받지만 그가 불만이었던 것은 사형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살인 강도’의 죄목으로 사형을 받을 수는 없다는 이유로 상고한다. 자신은 의병이고 차라리 ‘의적’이라면 모르겠으되 살인 강도의 혐의로 죽음을 당할 수는 없다고 결연히 선언한 것이다. “내 나라를 위해 싸운 내가 왜 강도란 말인가. 강도는 오히려 너희들이 아닌가.”

채응언 장군은 끝까지 살인 강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죽어갔다. 하지만 오늘날 어떤 이들의 눈으로 보면, 특히 “독립군은 만주에서 궤멸됐으니 1930년대 이후 독립군은 만주에 없었고 박정희나 백선엽이 토벌한 것은 그냥 비적 따위였다.”고 감히 주장하는 이들의 눈으로 보면 채응언은 ‘의병’이 아니라 강도에 가까울 것이다.

정규군의 풍채도 갖추지 못했고 무기 또한 빼앗은 것으로 싸웠으며 전투라고 해 봐야 헌병 기십 명 죽인 것이 다였는데 그걸 무슨 의병이라 부르며 그걸 어찌 전쟁이라 하겠느냐며 코웃음을 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채응언이라고 해서 그것을 몰랐을까. 이미 나라가 넘어간 마당에 헌병 나부랑이 몇 명 죽이고 친일파 몇 명 처단한다고 대세가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험준한 한반도 북부 산악지대의 칼바람과 정면으로 부딪치며, 일본군의 매서운 추격을 피해 가며 악착같이 그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바보였을까.

어쩌면 그는 역사에, 그야말로 역사에 몸을 기댔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일본놈들이 물러가고 내 나라가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내 충과 효를 기억해 주리라 하는 마음으로 “위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슬플뿐 여한이 없노라.” 당당하게 외치며 죽어갔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오늘날 ‘박정희는 독립군이 아니라 비적 토벌’ 따위의 말을 늘어놓는 작자들을 보고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의 혼령이 달려들어 독립기념관의 글자를 바꿔 놓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나라는 살아났지만 의병은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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