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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1. 이 삶의 시작

  • 입력 2014.10.28 11:05
  • 수정 2018.04.11 15:15
  • 기자명 309동12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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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른둘, 지방대학교 시간강사다. 출신 대학교에서 일주일에 4학점의 인문학 강의를 한다. 내가 강의하는 학교의 강사료는 시간당 5만원이다. 그러면 일주일에 20만원, 한 달에 80만원을 번다. 세금을 떼면 한 달에 70만원 정도가 통장에 들어오는데, 그나마 방학엔 강의가 없다. 그러면 70만원 곱하기 8달, 560만원이 내 연봉이다. 박사수료때까지 꼬박 메꾼 학자금대출에서 한 달에 20만원 정도를 떼어 가고, 이런저런 대출과 공과금을 하면 내가 쓸 수 있는 돈은 한 달에 10만원이 고작이다. 이걸로 남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신용등급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 지 오래고, 전화가 오면 앞자리가 02-1588로 시작하는지 확인 후 전화기를 돌려 놓는다. 이런 생활이, 몇 년째고,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학생들에겐 허울 좋은 젊은 교수님이다. 그들은 내가 88만원 세대보다 더 힘들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까.


자료: 사회통합위원회


1. 이 삶의 시작

나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해 많이 읽었다. 내가 살던 서울 강북의 가난한 산오름 동네에서는 저 집 아이가 그렇게 책을 좋아한다더라, 밥도 안 먹고 본다더라, 하는 오지랖 많은 아주머니들의 수군거림이 항상 있었다. 내 부모님은 그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셨고, 나도 싫지 않았다. 아버지는 퇴근길에 자주 교보문고에 들러 고심해 고른 책 한 묶음을 내게 건넸고, 나는 그것을 전기구이 통닭만큼이나 반갑게 받아 들었다. 하지만 책을 읽는 습관이 수학과 영어 점수까지 담보해 주지는 못했다. 중학 시절까지는 어떻게 버텼으나 수학1, 지구과학, 물리, 화학 등으로 이과 기초 과목이 분화되며 나는 거의 항복해 버렸다. 국어, 역사, 사회 과목만으로 대학을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을 자주 했다. 결국 수능 점수에 따라 꽤 먼 지방 대학교의 인문학부에 진학했다. 4시간 가까이 기차를 타고 내려가며 참 멀리도 대학을 간다, 싶었지만 ‘인문학’이면 아무 대학이면 어떠랴, 하고 말았다. 출신 대학이나 강의하고 있는 대학을 밝히고 싶지 않아 ‘A대학’으로 하겠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다. 인문학을 전공하면 행복할거야, 막연히 믿었던 내 과거를 부정하는 일은 할 수 없어서 이를 악물고 했다. 4년 내내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았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업이 많았지만 한 학기에 하나 이상은 내게 자극을 주는 것들이 있어서 그런대로 즐거웠다. 공통영어 성적이 여전히 발목을 잡기는 했으나 2학기부터 8학기까지 나는 꾸준히 장학금을 받았다.

군대에 가기 전 지금은 내 지도교수가 된 분의 전공 강의를 수강하며, 나는 전에 없던 자극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10년 넘게 연구해 이룬 성과를 우리에게 ‘즐겁게’ 이야기했다. 들으며 나 역시 즐거웠다. 인문학이라는 것이 허울이나 허상이 아니라 이렇게 실재가 될 수 있구나, 싶었다. 그는 가끔 대학원생이 더 있으면 좋겠다, 고 덧붙였다. 나는 학기말에 이르러 그의 연구실을 찾아 대학원 진학에 뜻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대단히 반기며 선배를 한 분 추천해주셨는데, 교수가 전화기를 든 지 10분도 안 되어 대학원생 한 명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나는 저서 한 권을 선물로 받았고, 연구실을 나와 그 대학원생과 마주 앉았다. 그는 시내에서 밥을 먹다가 지도교수의 전화를 받고 택시를 타고 왔다고 했다. 그러니까, 밥을 시켜 놓고 한 숟갈 먹을까 하던 찰나에 지도교수의 전화가 온 것이고, 그는 수저를 내려 놓고 택시를 잡아 타고 연구동까지 온 것이었다. 그때는 그 급박함이 느껴지지 않아서 아, 네, 그러시군요, 하고 말았다. 그는 내게 와서 공부하면 좋을 것이라고 했고 몇 가지 읽어야 할 책을 추천해 주고 다시 밥을 먹으러 갔다. 그리고 나는 곧 군대에 갔다. 지금에 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도교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었다면 그는 밥을 먹다 뛰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한 나는, 다시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그는 내게 새로 쓴 저서 한 권을 줬고, 내년부터 석사생으로 함께 공부하자고 했다. 마지막 학기에 그가 개설한 전공 수업을 들으며 나는 역시나 즐거웠다. 유일한 걱정은 입학비까지 500만원이 넘는 대학원 학비였다. 도저히 부모님께 대학원에 갈 테니 지원해 달라, 할 염치가 없었다. 나는 그후 대학원생들의 술자리에 한 번 간 일이 있다. 술자리는 시내 치킨집에서 간단히 맥주를 마시는 정도였다. 나는 그들에게 조심스레 학비가 얼마나 되는지, 생활은 되는지 물었다. 그중 한 대학원생이 조교활동을 하면 등록금이 해결되고 연구 인건비를 받으며 한달에 40만원 정도의 용돈이 생길 거라고 했다. 어라... 그러니까 조교로 학교사무실에서 근무하면 등록금이 나오고 교수에게 연구 인건비를 받으면 용돈까지 생긴다는 거였다. 나는 두 생각하지 않고 대학원 입학원서를 썼다.





집에 가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두분이 놀라시기 전에 대학원 등록금부터는 직접 해결하겠다고 장담을 했다. 학부 때의 등록금은 300만원 정도였는데 1/3 이상 장학금은 빼먹지 않고 받았다. 그래도 나와 동생의 등록금은 아버지가 외벌이하시는 우리 가계에 큰 부담이었을 것이고, 나는 대학원부터 공부에 필요한 돈을 내가 마련하겠다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독립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신 대학원 선배 둘과 한 방을 쓰게 됐으니 1년치 집세 150만원만 내달라고 부탁드렸다. 아버지는 두말 않고 150만원을 통장으로 부쳐 주셨다. 이렇게 나의 대학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2008년 봄, 26살인 나는 그렇게 이 삶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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