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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모독죄'

  • 입력 2014.10.22 16:23
  • 수정 2014.10.22 16:29
  • 기자명 정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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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어졌지만 한 때 ‘국가모독죄’라는 것이 있었다. 요즘 젊은 세대가 들으면 ‘뭥미?’라는 반응을 보이겠지만 실지로 한국에서 있었던 엄연한 사실이다. 이 ‘죄’는 1975년 3월 19일 공화당과 유정회가 야당을 배제한 채 날치기로 만든 법으로, 1988년까지 대한민국 형법 제104조 2항(국가모독 등)에 규정되어 있었다. 이를 어길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하도록 했는데, 외환유치죄·간첩죄 등과 함께 형법의 ‘외환의 죄’ 항목에 포함돼 있었다.

이 법이 겉으로 표방한 것은 ‘국가모독 등의 사대(事大)행위를 처단하며, 국가의 안전과 이익 그리고 위신을 보전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속내는 다른 데 있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자신들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대한민국 이외 지역에 거주중인 한국인이나 외국인이 유신 체제 및 대한민국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나 외국 언론을 통한 간접적인 비판을 형사처벌 대상으로 삼으려는 의도에서 만든 것이었다. 이 조항은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이듬해 1988년 말 폐지됐다.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국가모독죄’의 피해자는 실지로 있었다.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대통령을 두고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군 장교가 되어 우리 독립 광복군에 총부리를 겨누었다”라고 말했대서 ‘국가모독죄’로 옥고를 치렀다. 또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윤형 전 의원은 68년 ‘삼성 사카린밀수사건’ 당시 박 대통령을 ‘밀수왕초’라고 공격한 후 역시 국가모독죄로 옥살이를 했다. 둘 모두 ‘괘씸죄’가 적용된 셈이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 최고 권력자를 비판하는 것은 금기였다. 따라서 이를 어길 경우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근거법이 바로 ‘국가모독죄’였던 것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국가원수모독죄’를 거론하기도 하지만 실지로는 이런 법은 없었다. 이는 국가모독죄가 국가원수모독죄로 인식될 만큼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적용된 것을 오인한 결과다. 법제처는 1988년 말 형법에서 국가모독죄 조항을 폐지하면서 그 이유로 “국가발전을 위한 건전한 비판의 자유를 억제할 우려 등”을 들었다.

한때 대통령 비판이 국민놀이(?)로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다.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5년이 바로 그랬다. 그때는 대통령을 ‘노가리’라고 비판하거나 심지어 모욕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이 죄가 되거나 잡혀갈 걸로 여기지 않았다. 노 대통령 스스로 대통령 비판을 ‘국민스트레스 해소’ 정도로 여기며 흔쾌히 동의했다. 실지로 이 시기 일반국민들은 물론 심지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들조차도 ‘환생경제’라는 연극에서 노 대통령을 ‘육시럴 놈’ 등의 육두문자를 써가며 비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일로 그 누구도 어떠한 법적 제재도 받은 적이 없다.

그런데 요즘 ‘신판 국가모독죄’가 백주에 대한민국을 배회하고 있다. 일본 <산케이신문>이 박근혜 대통령 ‘의문의 7시간’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에 대해 박 대통령이 ‘대통령 모욕’을 거론하자 검찰은 문제의 기사를 쓴 <산케이신문>의 가토 다쓰야 기자를 불구속 기소했다. 전례 없던 일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극우성향의 <산케이신문>을 ‘언론자유의 투사’로 만들어줬다고 비아냥대기도 한다.

심지어 외신에서조차 박근혜 정권의 처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프랑스의 권위지 <르몽드>는 지난 16일 ‘한국에서 감시받는 언론’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한국에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틀 뒤인 18일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반자유의주의, 상처 난 곳에 소금뿌리기’라는 기사에서 “비판자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명예훼손법이 정부가 선택한 도구가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국 정부로서는 참기 어려운 수치인 셈이다.

그런데 <이코노미스트>의 지적 가운데 한국 정부와 박근혜 대통령이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 하나 더 있다. “박 대통령은 가토 씨 같은 이들이 자신을 모독함으로써 국민을 모독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국민은 더 심한 모독이 어렵게 얻어낸 이 나라의 민주주의에 가해졌다고 여길지도 모른다.”고 한 대목이다. 박 대통령이 그를 뽑아준 국민들을 더 심하게 모독했다는 얘기다. 청와대는 수긍할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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