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희 평론가 페이스북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나는 최광희 평론가의 담배꽁초 퍼포먼스를 비평의 자유로 인정한다. 별 대단치도 않은 비평에 왈가왈부 하고 싶지는 않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 뒤에 평론가의 담벼락에 전시된 행위들이다.


담배꽁초 인증으로 욕 한사발을 시원하게 들이킨 최광희는 자신을 비난한 네티즌을 고소하겠다 전했다.


이것은 공론장의 발언권을 가진 이로서 내 방식의 책임 수행입니다. 나는 하나의 사례를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미디어에 노출되지만 인격권을 존중 받을 권리가 있는 자연인입니다.” - 최광희



최광희 평론가 페이스북


그가 고소장에 밝힌 고소의 대상은 "이런 새끼가 무슨 평론을 해", "당신이 x 같은 겁니다"라는 발언이었다. 고작 저 정도 비난에 부들부들 떠는 자신을 고백할 수 없었던 평론가는 기발한 고소의 명분을 찾아냈다.


"나는 20년이 넘도록 이런 욕을 많이 먹었습니다. 그러나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들 가운데 다수가 자존감을 상실한 이들이라는 상상으로 버텼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프로필을 보니 꽤나 괜찮은 학력 자본을 가지고 있더군요. 그래서 응징하기로 결심한 겁니다." - 최광희


정리하면 지금껏 20년간 자신을 비판해온 사람들은 모두 학력자본을 갖지 못해 자존감을 상실한 무지렁이들이었지만, 이 사람은 학력자본을 가진 상대이기에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거다. 20년 동안 고소를 참아왔던 이유가 엘리트주의였다는 고백에 웃음이 나온다. 최광희 평론가는 "처벌을 원하십니까?"라고 묻는 경찰에게 "이 사람의 처벌을 매우 원합니다라고 답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본인의 범죄 현장을 전시하면서까지 비평의 자유를 누린 이 평론가는 고작 '이런 새끼'란 표현을 참을 수 없어 고소를 결심했다고 말한다. 피고소인이 어떤 학력자본을 가졌는지는 알지 못하나, 그것이 고소사유로서 변변치 못하다는 것은 잘 알겠다.


전시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 담배꽁초를 버린 사진을 전시하고, 또 그것 때문에 벌어진 다툼과 고소장을 전시한 비평가의 삶은 모순덩어리다.


삶을 전시한다는 건 스스로가 비평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평의 자격은 비평 받을 용기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다. 작년 깐느 영화제 수상작이 뭔줄 아냐며 대중의 호들갑을 규탄했던 이 비평가는 정작 대중의 비평을 감내할 용기는 갖지 못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