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주의 싸늘한 눈초리, 함께 알바한 친구 몇몇의 ‘너 참 독하다’ 하는 말. 2016년 겨울, 나는 돈에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해 나는 친구와 약속한 일본 여행을 위해 알바를 시작했다. 임금체불로 악명 높은 외식사업 프랜차이즈 업체였다. 난생처음, 나는 노동자의 삶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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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 며칠 후 알바 근로계약서를 썼다. 점주는 4대 보험 가입을 요구했다. 나의 안전이 이유였다. ‘보험 가입하면 알바비를 떼어간다는데…’ 생각하며 고민했다. 2016년 법정 최저임금 6,030원. 나에게는 그 돈이 너무나도 귀했다. 일고여덟 시간의 장시간 근무, 연장 근무까지 하며 마침내 한 달이 지났다.


고대하던 월급날, 통장에는 받아야 할 돈의 절반도 채 들어오지 않았다. 며칠을 참고 기다렸다. 은행 ARS는 같은 잔액을 되풀이해 말했다. 기계음이 ‘뭘 자꾸 물어?’ 하는 듯했다. 참다못해 노동청에 전화했다. 근무지와 이름을 말했다. 그런데 글쎄, 나는 등록된 노동자가 아니었다. 순간 머리가 멍했다. 전화를 끊었다.


4대 보험 가입이 돼 있지 않았다. 내 안전을 이유로 한 보험 가입은 몇 %의 보험료를 떼 가기 위한 본사의 거짓말이었다. 점주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는 자신에게 먼저 말했어야 했다며 벌컥 화를 냈다. 노동청에 전화한 것에 뿔이 난 것이다. 그때 말했다. “나는 내 돈 받을 생각밖에 없다. 지금 입금하지 않으면 노동청에 임금체불로 신고하겠다.” 그러자 쏜살같이 주휴수당을 포함한 월급이 입금됐다. 그가 말한 대로 그에게 먼저 말한 친구는 어땠을까? 그 친구는 회사를 그만둔 지 몇 개월이 지나서야 잔금을 받을 수 있었다. 주휴수당은 없었다.


그 후, 나는 한 달을 더 일해야 했다. 점주는 나를 보면 눈을 흘겼다. 함께 알바한 친구 몇몇은 ‘너 참 독하다’라고 말했다. 돌이켜보면 알바생 가운데 ‘제대로’ 임금 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같은 노동을 한, 같은 권리를 가진 그들조차 나를 몰아세웠다.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알바 하지 않았다. 억울했다. 일한 만큼 받기 위해 이토록 분투해야 하나 싶었다. 스스로 노동의 몫을 저버린 우리를 누가 존중할 수 있었을까. 씁쓸했다.



한겨레



지금도 곱씹는다. 나의 안전을 담보한 보험 가입이 그들에게는 돈 몇 푼 아끼는 일이었음을, 내 노동과 그 몫을 향한 싸움이 조롱거리가 된 일을. 한 사업장의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비단 한 명의 노동자의 일도 아닐 것이다.


사회는 노동자의 투쟁을 밥그릇 싸움이라 깎아내린다. 일상이 투쟁의 이유가 되는 것을 낯설어한다. 존중은 노동 현장에서조차 부재하다. 노동자는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채 근무한다. 고(故) 김용균 노동자는 헤드 랜턴 없이 손전등 하나를 들고 현장을 누비다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 먹고사는 문제가 곧 죽고 사는 문제가 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것을 우리는 노동자 의식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 의식을 공유해야 한다. 나아가 노동의 중요성이 사회의 공감대여야 한다. 내가 겪은 노동 현장의 문제 역시 앞선 것의 결여 때문에 벌어졌을 테다.


2019년 새해가 밝았다. 사회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최저임금은 작년 대비 10.9% 인상해 8,350원이다. 주 52시간 근무 전면 확대가 계획돼 있다. 사람들은 세상 참 살기 좋아졌다, 말하며 요즘 돈 벌기 쉽다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한다. 그러나 여전히 곳곳에 일한 만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며, 내 노동의 몫을, 그 가치를 가벼이 여기는 세상이 스친다.


아니, 어쩌면 세상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지 모른다. 오늘날 사람들은 구의역 김군, 태안화력발전소 고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에 쏟아져 나와 분노하고 있다. 정치인의 ‘노동 존중 사회’의 구호나 그 어떤 기업의 감언이설보다, 그 끓어오르는 분노가 꿈만 같던 ‘노동 존중 사회’에 작은 희망을 걸게 한다. 대중이 변하고 소리치고 있으니 꿈꾸던 사회는 바로 눈앞에, 그렇지 않다면 저기 손 닿을 곳에 있다고 믿고 싶다.



직썰 필진 고함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