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떴는데 가슴이 시끈하게 저리면서 이 별에 홀로 내던져진 느낌이 들고 일순 모든 일상이 다 징글징글하다. 시계를 보니 지금이 아무 의미 없는 오전 8시 19분인 것도 왠지 기분 나쁘고 들여다본 핸드폰에는 온갖 역겨운 세상의 단상들과 포스팅, 메시지가 그득그득.


누구한테 몇 대 얻어터진 억울한 블랙위도우 컨셉으로 중무장하고 기어 나와 집 앞에서 택시를 기다리는데, 내 눈앞에서 순식간에 택시를 스틸 해가는 사람을 보며 드는 생각.


'총이 있으면 쐈을 것 같아...'


온갖 미친 상상을 하면서 결국 잡아탄 택시의 기사는 나에게 불친절해도 화가 나고 지나치게 친절하면 더 화가 난다. 그렇게 자아 분열과 미친 의식의 흐름으로 종일 우울에 질식해있던 그 날의 저녁나절. 귀갓길 편의점에 들러 요즘은 잘 먹지도 않는 소주 그것도 페트병 소주를 바구니에 담으며 두 병 살까 세 병 살까, 네 병 살까 역시나 미친 고민을 하던 찰나, 익숙한 데자뷰와 함께 자궁을 ‘탁’ 치는 깨달음이 있다.


'아... 그 친구가 올 때가 됐구나...'


얘가 한 달에 한 번씩 날 찾아온 지 벌써 십수 년이 됐건만 나는 여전히 그 방문에 익숙지가 않다. 제일 불행할 때는, 분명히 문밖에서 소리가 들리는데, 분명히 무슨 기척이 있는데 이 년이 벨을 안 눌러. 나가서 문 열고 질질 끌고 들어오고 싶은데 우리 사이에서 나는 철저한 '을'이므로 그런 건 도통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 년은 좀 간악한 데가 있어서, 내가 저를 기다리는 것 같으면 일부러 더 질질 늦게 기어오는 것 같기도 하다.


얘가 올랑말랑 밀당할 때마다 정말이지 너무 불행하고 내 주위의 모든 게 다 한심하고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한심하고 그래서 미쳐버리겠고, 대체 내가 왜 태어난 건지도 모르겠고 집에 불이라도 놓고 싶고 너무너무 성대하게 침울하다. 호르몬, 너는 대체 누구냐.


빈방에 대각선으로 누워 텅 빈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며 바그다드 카페의 calling you를 듣는다.


이렇게 며칠 동안 밀당을 겁나게 당하다가 모든 걸 체념하고 소주 끝에 소피보러 들어간 즈음. 이 친구는 꼭 내가 자고 있을 때나 화장실에 가 있을 때 오는데, 이년이 그 징글맞은 붉은 낯으로 띵동! 하는 순간 나는 자존심도 다 내팽개쳐버리고 버선발로 뛰어나가며 더없는 환대를 해준다.


"왔니!!!!!!!!!!" "아이구 이번엔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이 배은망덕한 년은 따스히 맞아줘서 고맙단 말도 없이 오자마자 내 허리춤을 가격하고 아랫배를 찌르고 쉴 새 없이 뜨거운 생굴을 낳게 하는 등 기상천외한 고문을 시키고 골반뼈를 양옆으로 당겼다가 깔깔 웃으며 툭 놔버리고 몇 날 며칠을 죽도록 괴롭히는데, 그래도 어쨌든 방문해주었으니 기분만은 좋다고 생각한다. (참나, 니가 뭔데?)


신기하게도 이 친구가 찾아온 이후에는, 몸은 좀 고달파도 마음만은 편안해진다. 총으로 쏴버리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사랑스러워진다. 말끝마다 찾던 시베리아 허스키는 어느새 귀여운 시츄가 되어있다. 그러츄~ 사람이 그럴 수도 있츄~ 화낼 필요 없츄~ 내가 좀 예민했츄~


어쨌든 그렇게 지맘대로 찾아와 거의 일주일을 궁둥이 붙이고 눌러앉아 있다가는 "다음 달에 또 올게 안녕~" 역시나 제멋대로 갑작스레 행장 차려 떠나곤 하는데, 그 이후 어떤 땐 기별도 없이 너무 일찍 오고, 어떤 땐 너무 늦게 오고 잔뜩 풍악만 울리더니 끝내 안 와버리는 때도 드물게는 있다.


이년아, 이 나쁜 년아. 얼굴 붉은 년아. 이 안면홍조 있는 년아.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나 자식은 한 번 낳아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꼬드김에 넘어가는 바람에 일 년에 열 두 번씩 부채 갚게 만드는 이 지독한 년아. 달마다 사뿐히 날아와 순식간에 모든 것을 앗아가는 카드값 같은 년아. 원투데이 같이 지내는 것도 아닌데, 또 앞으로 원투년 함께 할 것도 아닌데, 너 사람을 두고 왜 그렇게 밀당을 하니, 증말.


허리에 죽빵 날리는 것도 대바늘로 아랫배 찔러대는 것도 복수박 수준으로 가슴 부풀려놓는 것도 나를 한시적 개또라이로 만드는 것도 다 이해할게. 제발 오기로 약속한 때에 오기만 해줘. 알겠니? 그거면 돼. 더 바라는 것도 없어. 제때에만 와. 응? 알겠냐구, 이 붉고 못된 맨숙이년아!


디어, 붉은 맨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