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역사학자 데이비드 어빙(티모시 스폴)이 책에서 자신을 비판한 데보라 립스타트(레이첼 와이즈)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히틀러 연구자인 어빙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한 적 없다고 주장하며 인종차별적인 발언으로 학계에서 배척당했지만 독일 네오나치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니 적당히 타협하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립스타트는 어빙과 법정에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미국 법정과 달리 영국 법정에선 명예훼손의 무죄 추정 원칙이 적용되지 않아 피고인이 고소인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해야 한다. 이 사건이 국제적인 관심을 끌면서 다이애나 왕비의 이혼 사건을 변호했던 안소니 줄리우스(앤드류 스콧)와 리차드 램턴(톰 윌킨슨)이 무료 변론을 자처한다. 법정 공방은 1996년부터 4년에 걸쳐 계속된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영화의 소재를 처음 접한 사람의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부정할 수가 있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수많은 증언이 존재하는데? 그런데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고 이상한 사람도 많다. 박사학위까지 받은 대학교수가 주장을 하니 단순히 미치광이의 말로 무시할 수도 없다. 그렇게 홀로코스트는 50여 년 만에 영국 법정에 섰다.


이 글에는 영화 후반부 이야기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있었던 사건을 스포일러로 봐야 하는지는 읽는 분의 판단에 맡깁니다.




어빙이 홀로코스트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간단하다. 남아 있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증거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겠다면서 사람들을 현혹한다. 당시 나치는 가스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으로는 알 수 없고, 나치가 전쟁이 끝날 때 가스실은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현재는 건물의 잔해만 남아 있다.


어빙은 원래 노동범 수용소로 만들어진 아우슈비츠가 가스실로 쓰이기에 용도가 맞지 않고, 가스실로 쓰였더라도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시체들의 이를 멸균하는 곳이었다고 주장한다. 생존자의 눈물겨운 증언에 대해 어빙은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모욕하기까지 한다.


이처럼 자기 멋대로 역사를 왜곡하고 거짓을 주장하는 선동가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영화는 거짓을 누르기 위해서는 감정적으로 대처할 것이 아니라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말한다. 증거는 소실됐지만 그의 주장 자체에 모순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어빙의 말을 어빙의 말로 공격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법정에서 벌어지는 몇 년간의 진실 공방을 밀도 깊게 중계한다.



램턴을 비롯한 립스타트 변호인들은 어빙의 말이 거짓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가 지금까지 쓰고 펴낸 자료들을 파고든다. 변호인단은 어빙이 히틀러의 명령서를 번역할 때 왜곡한 것을 찾아내고, 이에 단순 실수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그를 향해 반복된 실수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어빙의 가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만 저질러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영화의 제목인 ‘나는 부정한다(Denial)’는 중의적 표현이다. 하나는 영화의 내용 그대로 아우슈비츠에 대한 부정이고, 또 하나는 진실 왜곡에 맞서기 위해 길고 긴 법정 공방에서 흥분을 배척하는 부정이다.


소송은 립스타트의 결심으로 시작되지만 정작 립스타트는 법정에서 한마디도 하지 말 것을 자신의 변호사들로부터 요구받는다. 흥분하면 주목은 끌 수 있으나 재판에서 진다는 이유였다. 영웅이 되고 질 것인가 아니면 입을 굳게 다물고 이길 것인가. 립스타트는 후자를 택하고 그의 베테랑 변호사 랩턴은 밤낮으로 공부해 어빙을 멋지게 공격하는 데 성공한다.


나중에 그녀는 램턴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양심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네요.” 법정 진술을 거부당한 홀로코스트 유대인 피해자들도 자신의 양심을 립스타트에게 맡겼고, 립스타트 역시 같은 선택을 했다. 다행히 진실은 싸우는 사람을 결코 혼자 두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면 진보는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을 구축하는 과정에는 수고스러운 대가가 따른다. 그냥 무시해 버리면 거짓 선동은 알아서 사라지지 않겠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거짓은 끈질기게 진실을 괴롭힌다.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일수록 사람들은 이를 회피하려고 한다. 최근 확인되지 않은 가짜뉴스가 동조자들의 불안 심리를 파고들며 급속하게 퍼져 세상을 흔든 것처럼, 진실은 발이 느리고 거짓은 사람의 마음을 쉽게 흔든다.


데이비드 어빙 같은 인물은 어디에나 있다. 홀로코스트가 없었다고 부정하거나, 일본군 위안부가 없었다고 부정하거나, 박근혜가 공권력으로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부정하거나, 광주 민주화운동을 부정하거나 등등.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이런 거짓을 퍼뜨릴 자유까지 인정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거짓말까지 포용하는 제도는 아니다. 그것이 의도적인 왜곡이라면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서라도 더 엄격해야 한다.


소송에서 진 어빙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견해를 수정할까? 천만에. 왜곡한 사료로 법정 공방을 벌일 정도로 집착하는 그에게 홀로코스트 부정은 팩트에 기반한 연구가 아니라 종교적 신념이다. 그는 반유대주의 연구자를 넘어서 반유대주의자 그 자체가 됐다. 믿음에 맹목적인 사람들은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광신도처럼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 뿐이다.


오랫동안 회자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인용 판결문. ⓒ연합뉴스


마지막 장면에 의미심장한 대사가 나온다. 두꺼운 분량의 법정 판결문이 향후 어빙의 주장이 무분별하게 퍼지는 것을 막아주는 거대한 방어막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법의 공신력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인지 이후 홀로코스트가 없었다는 주장은 사그러들었다. 최근 한국도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이 박근혜 탄핵의 정당성을 확인해 줬고, 그날 거짓 선동은 힘을 잃었다. 그렇게 진실은 거짓을 하나씩 막아내면서 역사라는 대지 위에 탄탄하게 뿌리내린다.



<나는 부정한다>는 73세의 영국 감독 믹 잭슨이 작년에 만든 영화다. 그 유명한 케빈 코스트너, 휘트니 휴스턴 주연의 <보디가드>(1992)가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블록버스터 <볼케이노>(1997) 이후 주로 영국 BBC와 채널4에서 미니시리즈와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다. <나는 부정한다>는 만듦새가 매끄럽지는 않으나 실화에 기초한 이야기를 정공법으로 풀어내 울림은 꽤 묵직하다.


<나는 부정한다> ★★★

한줄평: 진실은 저절로 밝혀지지 않는다.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