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소에 취재차 방문할 때면, 항상 화제의 중심을 형성했던 소재는 사형수들이었다. 사형수라는 이유만으로 가슴에 빨간 딱지를 단 그들은 교도소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험상궂은 조폭도 빨간 딱지 앞에서는 눈을 내리깔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존재이기에, 아무리 우악스러운 이들이라도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형수를 똑바로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희호 여사 자서전에도 이 내용이 솔직히 표현되어 있다. 김대중 대통령 정도 되는 인물도 (물론 이희호 여사는 그 책에서 이 남자 사실은 겁이 많다고 폭로(?)하긴 했다.) 재판정에서 사형과 무기징역 중 무기징역을 바라며 재판장의 입술이 '사' 하면서 벌어지지 않고 '무'를 발음하며 튀어나오기만을 간절히 쳐다봤다고. 그런데 이 무서운 사형을 우습게 만든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김병곤이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당시, 검찰은 스무 살 안팎의 무고한 젊은이들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당시는 유인물 몇 개 뿌리고 데모 몇 번 기획만 해도, 그것을 빌미로 얼마든지 사람을 사형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 시대였다. 게다가, 검찰의 구형은 절대적이었다. 검사가 구형하면 거의 판사도 그에 상응하는 판결을 내리던 시대였으니. 검찰의 사형 구형은 곧 사형 판결과 같았다. 그런데 그 때, 한 청년의 육중한 음성이 재판정을 울렸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수의를 입은 앳된 청년은 웃음까지 머금고 있었다. 사형 구형이라는 준 사형 선고를 받은 이가 얼굴이 새파래지기는커녕 봄같이 싱글거리는 웃음을 얼굴에 띄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우렁우렁한 목청이 재판정을 흔들었다.


검찰관님, 재판장님,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사형이라는 영광스런 구형을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민생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에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1992, 180 ~181쪽

그가 바로 김병곤이었다. 1952년생, 당시 나이 스물 둘. 기소자 가운데 가장 어렸다. 당시 김지하 시인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분명히 사형은 죽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영광입니다’. 확실히 그렇다. 우리는 드디어 죽음을 이긴 것이다. 병곤이 한 사람, 나 한 사람이 이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집단적으로 이긴 것이다.

고행 1974 중에서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1년도 되지 않아 별안간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선포했을 때를, 김병곤은 이렇게 회고했었다.


10월유신이 났을 때 나는 학교 옆에서 하숙을 했어. 하숙방이 두서너평 되는데, 그 방에 무려 열 몇명이 모여가지고 통곡을 하고 울었어. '이제는 도저히 안된다'고 전부 다 결의를 한 거야. 이제는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 사생결단을 할 수 밖에 없다. 이거는 아예 없애야지, 그냥 반대하는 차원이 아니다...

젊은 총각들의 하숙방 결의. 김병곤은 그 결의대로 살았고 죽음을 당당히 직면했다. 다행히 당시 그가 받은 사형선고는 집행되지 않았지만, 석방된 이후로도 그는 수시로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




그 어둠의 세월에 빛이 있었다면 아내 박문숙이었을 것이다. 서울여대 74학번으로, 서울여대 운동권의 뿌리라 할 ‘녹수회’ 회원이었던 그녀는 교회 야학에서 김병곤을 만났다. 결혼을 한 뒤 두 딸이 태어났고, 한 때 김병곤은 괜찮은 직장을 잡아 알콩달콩 가정생활을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가 지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이라는 희대의 살인마가 대한민국 권좌에 앉으면서, 김병곤은 또 다시 민주화 투쟁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아내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전해진다.


군부독재를 대물림하지 않겠다.

사랑하는 딸들마저 군홧발의 독재 하에 살게 할 수 없다는 의지, 그리고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 독재의 흐름을 끊어놓겠다는 각오. 그렇게 독재와의 싸움에 나선 운동가의 아내로서, 박문숙은 번역부터 악세사리 가게, 보험 외판원 등 모든 일을 다 하며 두 딸을 키웠다. 감옥에 들어간 남편이 “면회 올 가족 없는 학생이 있으니 바라지 좀 해 달라.”고 하면 그 사람까지 챙겨야 했고, 또 잡혀가면 구속자 가족으로서 악다구니도 쳐야 했고 첩보원(?) 노릇도 해야 했다.


그 사람이 제일 먼저 연행됐을 때 용산경찰서에 가서 난리를 치니까 고○○ 검사 방에서 면회를 시켜 주더라. 그이가 자꾸 고무신을 벗었다 신었다 하며 눈짓으로 아래를 가리키더라. 내려다 보니 조그만 쪽지 하나가 신발 속에 있었다. 내가 운동화 끈을 매는 척 하며 집어들고 나왔다. ‘조사 방향이 (삼민투 배후 색출이 아니라) 민청련 전체에 대한 탄압으로 가는 것 같으니 김근태 의장이 피신하는 게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박문숙 여사의 회고 중

두 딸은 아버지의 얼굴을 제대로 볼 틈도 없이 자랐다. 그리고 아버지의 형극은 이른바 민주화가 진행된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김병곤 최후의 구속은 1987년, 대통령 선거 부정투표함 의혹이 불거진 구로구청 농성 사건 때였다. 부정 투표가 맞다고 해도 대세에는 변동이 없었을 테지만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던 그는 현장에 남기로 결정했다. 출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다시 수감된 김병곤은 옥살이 중 병을 얻었다. 위암이었다. 계속 소화가 안되고 배에서 멍울이 잡히는데도, 교도소 의사는 소화제만 주었다. 병의 정체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는 1990년 12월 6일. 평생 몇 번 안아보지도 못했을 두 딸과 아내를 남기고 세상을 떴다. 문익환 목사는 고인의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그가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해도 그의 이 점만은 버려야지 할 게 있다고 생각되세요? 저는 그걸 터럭만큼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김병곤씨는 머리카락 한 올까지 내 속에 내재화돼 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도 그런 마음이었겠지만 김병곤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를 가장 잘 알고, 또 그의 삶을 ‘내재화’시켜 이후를 살아내야 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아내 박문숙이었을 것이다. 남편이 세상을 떠날 당시 경실련 사무국장 직함을 맡고 있던 아내는 이후로도 남편이 살아내지 못한 세월을 살며 그가 미처 하지 못한 일을 이으려고 애썼다. 얼마 전까지 사단법인 녹색환경운동 이사장을 맡고 있었던 그녀는 작년 4월 세상을 등졌다. 그녀 또한 암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병이 알려진 뒤에 후배들이 후원 모임을 만들려는 것을 완강히 막았고, 조용히 세상을 떴다.




세상에는 하고많은 사랑이 존재할 것이다. 죽고 못사는 사랑도 있고, 아름다운 것도 있고 추하다 싶은 사랑도 있고, 사랑보다는 욕심이나 집착같을 수도 있고 이뤄지지 않는 짝사랑도 있을 터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는 혼연일체가 되어, 가족의 테두리를 넘어선 더 큰 사랑을 실천한 부부들이 많다. 이 부부도 그 중 하나다. 유신 선포 앞에서 “이건 아니다. 사생결단을 내야 한다.”고 땅을 치며 통곡하던, 사형 구형을 오히려 영광으로 받아들인 용감한 남자와 남편이 미처 못 살고 간 삶을 충실하게 살아낸 정의로운 여자.

새삼, 군부독재를 대물림하지 않겠다던 이 분들을 추억하기가 부끄럽고 슬프다. 우리는 지금 국정교과서를 대물림하고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