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과 공화당을 막론하고 미국 경제는 물론 전 세계의 성장 잠재력을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가 불평등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의 임금은 정체돼 있고, 노조의 힘은 계속 약해지고 있는 가운데, CEO의 연봉은 무리하게 일을 벌이든 회사를 말아먹든 상관 없이 연일 치솟습니다. 상황이 이렇지만 특히 미국에서 정치를 하려면 대다수 유권자들보다 먼저 억만장자 한 명의 마음을 사로잡아야만 합니다.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선거판에서 살아남으려면 따를 수밖에 없는 룰입니다. 분명 희망적이기보다는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중산층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미국에서 대다수 서민들은 왜 이런 상황에 분개하지 않는 걸까요?




미국에도 독점 자본에 대한 적극적인 규제, 강성 노조, 노동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던 정부의 시장 개입이 선거마다 주요 이슈였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중반을 아우르는 약 반세기 가까운 시기로 그렇게 멀지 않은 과거의 일입니다. 이 시기 미국 유권자의 다수가 된 노동계급은 거대 자본에 대한 규제, 최저임금 도입, 실업급여 및 고용 보험 시행, 노동조합 확장과 사회보장 제도 정비에 이르기까지 많은 정책들을 관철시켰습니다. 그 이후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철폐되고, 여성에 대한 차별도 제도적으로는 철폐되기에 이르렀지만, 전체 국민의 삶에 영향을 주는 불평등 문제를 구조적인 과점에서 지적하고 고치려 드는 움직임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조지타운 대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스티브 프레이저(Steve Fraser)는 최근 그의 저서 『묵인의 시대(The Age of Acquiescence)』를 통해 흐려진 계급 의식이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습니다. 프레이저는 특히 자수성가한 훌륭한 창업가들을 향한 과도한 사회적인 칭송이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스티브 잡스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허상을 심어주고, 허상을 좇는 개인들은 구조적인 문제에 둔감해지고 나아가 눈을 감아버리게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프레이저는 자유의 개념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살핌으로써 묵인의 시대를 성찰하기도 합니다. 즉, 20세기 초 진보 운동이 한창이던 때의 자유는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가 말했던 궁핍으로부터의 해방(freedom from want), 공포로부터의 해방(freedom from fear)처럼 집단적인 권리의 개념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자유는 경쟁을 바탕으로 한 자유시장 경제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다른 말로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는 코크 형제 같은 억만 장자들이 마음대로 돈을 쓰고 원하는 걸 이루고자 할 때 공동체의 선 같은 뜬구름 잡는 소리를 내세우며 규제를 하려 드는 정부로부터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liberty)를 지키는 뜻이 강조됩니다.

노동 계급, 또는 대다수 국민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하는지가 불평등이나 불합리한 구조에 맞서 행동에 나설지 여부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우선 미국에서 최근 들어 불평등의 문제점을 규탄하는 시위가 없었던 게 아니죠. 모두가 알다시피 3년 전만 해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가 전 미국을 휩쓸었습니다. 이들은 자본시장 질서를 왜곡하고 부를 갈취하는 1%에 맞서 스스로를 ‘99%를 대변하는 시위대’라고 불렀죠. 또한 패스트푸드 체인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시급 $15 (약 17,000원) 인상을 주장하며 릴레이 가두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시위들은 끝내 대다수 국민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정책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자, 다시 시계를 20세기 초로 돌려보죠. 당시 미국 정치의 양대 정당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포퓰리즘 정당이든 공업 도시를 기반으로 한 연방주의자들이든 스스로를 ‘생산 계급(producers)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여겼습니다. 생산 계급의 노동 없이는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에 거대 자본, 특히 악덕 자본가가 노동 계급을 착취하여 부를 추구하는 걸 규제를 통해 막고 보다 윤리적인 자본주의를 실현하는 데 힘을 썼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지지 기반을 다질 수 있었기에 정당 입장에선 당연한 선택이었던 것이죠. 대공황 초기 미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지금보다도 형편없었고, 노조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상태였습니다. 1933 ~ 1945년 12년 사이 노조가 여섯 배나 세를 불릴 수 있던 건 당시 대다수 국민들의 거대 기업, 악덕 자본에 대한 반감이 노조에 대한 호응, 신뢰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193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루즈벨트는 자유시장 질서를 운운하며 정부의 모든 개입에 반대하는 공화당을 강력히 비난했습니다. 그러면서 시민들의 권익과 복지 실현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이 분명히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연설이 전국적인 호응을 얻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적어도 수백, 수천 만 노동자들은 루즈벨트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세월이 흘러 지난 9월 미국 노동절 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큰 맥락에서는 비슷한 말을 합니다. 노동조합의 필요성과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이었죠. 마찬가지로 순전히 이 연설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두 달 후 중간 선거에서 유권자 가운데 적잖은 비율을 차지하는 백인 노동자들은 압도적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상대편인 공화당을 찍었습니다.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언급한 연설이 노동자 계급에게 전혀 울림을 주지 않았던 것이죠.

물론 노동 운동, 사회 운동을 하는 데 있어 과거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요소들(인종, 성적 지향, 권위주의 등)이 문제가 되긴 합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자본이 분배되는 논리와 원칙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거대 자본과 대다수 국민(노동 계급, 생산 계급, 기층 대충, 서민, 다수 유권자 어떤 표현이라도) 사이에 균형 잡힌 쌍방향 소통을 이룩하려면, 한 배를 탄 운명체의 계급이 모여 의견을 모으고 그 의견을 적극적으로 전달하고 표출하는 방법과 전략을 고민해야 합니다.


원문보기